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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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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3
샬롯의 여인/ 워터하우스
The Lady of Shalott/ John William Waterhouse
 


전설 속으로의 망명


햇볕이 눈부신 런던의 어느 날, 당신에게 망명이 필요한 그 날, 맘에 드는 친구 한 명을 꾀어내 미술관으로 망명하기를 권한다. 노숙자들의 망명지인 복스홀(Vauxhall)역에서 내려 복스홀 다리를 건너 적전도하(敵前渡河)한다. 그리고 전설의 감옥 ‘밀뱅크 감옥’ 자리에 매립된 영국 미술의 위대한 망명지 ‘테이트브리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본다. 당신에게 왜 망명이 필요했는지, 당신의 시간이 왜 위태로웠는지, ‘대략난감’으로 떠오를 것이다. 어느덧 날씨는 급변하여 속도감 넘치는 런던의 먹구름들이 출몰하고, 당신의 얇은 외투는 쓸쓸함으로 치를 떨 것이다. 터너를 비롯한 영국화가들이 일제히 망명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깊숙이 들어 갈수록 당신의 망명은 테이트브리튼의 격조를 따라 자연스럽고 늠름해질 것이다. ‘라파엘전파’의 방에 들어서면 당신의 섣부른 하루짜리 망명도 전설 속의 이름처럼 우아해지리라. 얌전한 양고기 도둑들처럼 갇혀 버리리라.

 

라파엘전파의 그림들은 함께 모여 있을 때 힘을 발휘하며 더욱 빛난다. 라파엘 이전의 순수한 미를 추구한 그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는 서양미술사 속의 전설로 남아 있다. 라파엘로 대변되는 대가들의 테크닉이나 기법이 순전히 그림 속의 미를 위한 위선(僞善)이었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위악(僞惡)으로의 무장이었을 것이다.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전설의 세계 속에 탐닉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위악도 위선도 모두 자연스럽게 용납되는 세계가 전설이며, 전설 속에서라면 정형화된 그림의 미를 뛰어넘을 배짱과 담대함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워터하우스(1849~1917)의 ‘레이디샬롯(1888)’은 라파엘전파의 전설을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우아한 전설이다. 영국의 국민시인, 계관시인이었던 알프레드 테니슨의 동명의 시에서 테마를 가져온 그림이다.

 

아더왕 시대의 전설적 여인 일레인의 이야기다. 마법에 걸린 그녀는 샬롯이라는 섬의 성에서 살았다. 하루 종일 옷감을 짜는 그녀는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마법에 걸린 여인이었다. 성밖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운명과 함께 그녀는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아야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거울에 비친 꽃미남 원탁의 기사 랜슬롯경(아더왕의 부인 기네비아와의 사랑으로 유명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단 한번의 바라봄만으로 깊은 사랑에 빠진 그녀는 운명을 거역하고 성밖으로 나간다. 랜슬롯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싶었던 그녀는 배를 저어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 간다. 잔인한 운명을 품은 채 그녀는 배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워터하우스는 배를 몰고 마치 운명을 헤치듯 강물을 헤치려는 그녀의 모습을 한편의 시처럼 그려내고 있다. (음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캐나다의 만능 뮤지션 로리나 맥케닛(1957~ )의 아름다운 목소리 ‘The Lady of Shalott’을 들어 보길 권하고 싶다.)

 

워터하우스는 특히 그리스신화나 아더왕전설을 통해 많은 아름다운 그림을 남긴 영국 화가다. 로제티 같은 1세대 라파엘전파의 후배격인 그는 특히 레이디샬롯에 관한 그림을 세 점이나 그렸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버전이 바로 이 그림이다. 이런 그림 앞에서 라파엘전파의 한계성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워터하우스는 프랑스 인상파들의 화풍을 충분히 바라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전설을 통해 새로운 미를 추구하려 하였던 라파엘전파의 정신이 몽환적으로 느껴진다. 인상파들의 혁명이 다분히 프랑스식 유혈혁명 같은 것이었다면 라파엘전파의 그것은 이렇게 보다 얌전하고 예의바른 영국식 무혈혁명의 형식을 띄고 있다. 영국인들은 한꺼번에 많은 것이 바뀌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단단하게 바뀌기를 원한다. 그런 영국의 전통적 속성은 런던에 거주하는 수백만 외국인들을 가끔 열통 터지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런던은 영국이다. 런던에서 열통 터져본 경험이 있는 외국인이나 여행객들은 이 그림을 정성껏 읽으며 열을 좀 식히시길. 

 

평생 거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아왔던 한 여인이 배를 타고 세상에 나왔다. 세상은 역시 거울과 반대였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보았던 연인들의 사랑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거친 강물 위에 떠 있다. 그녀의 표정은, 연모 마저 덮어버린 깊은 불안의 표정은 바로 런던에 처음 도착한 당신의 표정이다. 그녀 앞에 놓인 세 개의 촛불은 이미 하나만 남아 있다. 촛불은 당신이 런던에 지불하려고 준비했던 여비를 의미한다. 날은 저물려고 하는 것 같다. 그 흔한 런던의 어둠에 아직 적응되지 못한 그날의 푸석했던 당신 머리칼을 아직도 기억하는지. 오랜 비행에 지친 머리칼. 그녀는 단단하게 뱃줄을 붙들고 있다. 생각나지? 트렁크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히드로공항에 핀 한송이 꽃이었던 그날의 당신. 그녀가 준비한 천들은 아마도 그녀가 거울을 보며 평생 짰던 작품들인 모양이다. 랜슬롯경을 만나면 바닥에 깔아주려고 준비했겠지. 그날 당신이 준비했던 걸 기억해? 서울에서 가져온 열쇠고리나 부채 같은 허접스러운 기념품들. 그래, 당신은 샬롯의 여인처럼 런던으로 망명 온 외국인이지. 전설의 기사 랜슬롯을 꼭 만나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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