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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6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에드가 드가
Miss La La at the Cirque Fernando/ Edgar Degas
 


엿보기의 미학

 

 

전 세계적으로 엿보기(peeping) 프로그램들이 유행이다. 21세기 대중문화 트랜드의 보이지 않는 실세가 어느덧 엿보기가 된 것 같다. TV에서는 출연자들간의 거리낌 없는 대화들이 환영 받고, 패션에서도 엿보기를 위한 배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영국 채널 4의 ‘빅브라더’는 전세계적으로 엿보기 프로그램을 유행시킨 기념비적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1999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이 세계적 엿보기쇼의 이름은 모니터를 통해 늘 모든 것을 감시하는 관리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죠지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가져온 것이다. 런던의 첼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미니스커트는 엿보는 자들을 의식하는 패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사람이 엿보기에 남다른 소질이 있다는 것은 이미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영국의 엿보기는 절대로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코너숖 선반 위쪽을 점령한 다양한 옐로페이퍼들은 과연 언제 팔리나 싶을 정도로 사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힘들지만, 은밀한 매출을 자랑하기에 쉽사리 망하지 않는다. 반투명 속 커튼 뒤에서 은밀히 창 밖을 바라보는 할머니들이 영국 치안 유지에 일조하는 보이지 않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표현은 정확한 풍자에 해당한다. 런던이 엄청난 감시카메라를 소유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 것이다. 영국의 엿보기문화가 은밀해야 한다는 불문율을 가졌다면 보다 직설적인 나라 프랑스의 그것은 보다 과감하다. 로브그리예의 신소설(누보로망)들이 지녔던 엿보기의 치열함과 집요함은 쉽사리 은폐되기 힘든 것이다. 로브그리예의 확실한 선배인 인상파의 거장 드가의 그림을 볼 순서다. 내셔널갤러리에서 관람객들을 어지럽게 하고 있는 공중의 여인,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1879)’라는 여인이다.

 

드가(1834~1917)는 인상파의 대표적 인물로 뛰어난 소묘실력을 지닌 화가였으며, 발레, 목욕, 춤, 머리빗기 등의 인간 동작을 테마로 많은 그림을 그린 다산작가다. 클로즈업 시킨 스냅사진 같은 그의 작품들은 시선만으로도 화가의 개성이 표현될 수 있음을 가르쳐준바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괴팍한 남자 드가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수많은 여자들을 그린 이상한 남자다. 그가 표현해낸 수많은 동작들은 그 즉흥성과 경쾌함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다. 그의 그림은 엿보기라는 단어가 주는 음침하고 불쾌한 뉘앙스를 극복하는 경지에서 개성적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히로인 ‘라라’는 당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곡예사였던 듯 하다. 신기에 가까운 묘기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오늘날의 표현으로라면 대중스타였던 라라를 드가는 그다운 특이한 시선으로 바라 보고 있다. 밧줄을 입에 문채 공중에 매달린 그녀가 주는 스릴과 긴장감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그 솔직함의 표현은 평소 소외되고 화가들이 외면하였을 극장의 천정과 벽면 상부의 모습들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오렌지 빛이 지배하는 이 그림의 배경은 따라서 지극히 자연스럽다.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무대가 아닌, 천정에서 벌어지는 기발한 쇼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배경인 것이다.  특이한 시선이 준 배경, 즉 엿보기가 가져다 준 것이다. 오렌지 배경 속에 떠 있는 라라의 피부(흑인이었을까?)는 극장 인테리어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그녀의 하얀 복장은 오렌지색 속에서 빛나는 새로운 하얀색이다. 주조인 오렌지 빛과 조화를 이루는 하얀색, 드가의 색감은 이런 식이다. 이러한 드가의 색감은 개성적 엿보기에 걸맞는 색감이었던 셈이다. 끝부분의 매듭이 보이지 않는 두 가닥의 밧줄은 공중에 매달린 라라의 몸통과 평행을 유지하며 팽팽한 긴장감으로 늘어져 있다.  

 

드가의 엿보기를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의 엿보기는 관찰의 밀도이며 관심의 숙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싶다. 천편일률적 시각이 강조되는 현대인에게 아주 필요한 시각이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공평하고 일반적인 바라봄을 저지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시각을 드가의 그림들은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개성의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선을 지향하는 교육을 통해 인간의 개성적 시각은 상처 받으며 도태된다. 현대는 더욱 그렇다. 보다 강하고 정열적 개성을 간직한 시선을 지니지 않으면 현대인은 맹목적이거나 교조적이기 십상이다. 돈이나 명예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개성적 시각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엿보기의 긍정적 해석이 필요한 시대다. 일반적인 관찰을 넘어서는 개성적 바라봄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영국 엿보기 문화의 여러가지 징후들은 그러한 개성을 보장하고 나아가 격려하기 위한 고도의 사회장치인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영국에 존재하는 ‘왕실엿보기문화’는 개성적 판단을 왕실이라는 최고의 가문을 향해 표현하는 일종의 긍정적 엿보기이며, 사회 계급간의 발란스를 보완하기 위한 앙증맞은 융통성인 것이다.

 

현대인으로서, 드가의 시선을 특별히 존경한다. 은밀하고 음침한 골방 속의 엿보기가 아닌, ‘나홀로 바라봄’의 미학으로서의 드가의 예각(銳角)과 의시(疑視)를 철저히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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