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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엠마오 성찬 / 카라바조

hherald 2010.07.17 19:19 조회 수 : 3407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27
엠마오 성찬/ 카라바조
Supper at Emmaus/ Caravag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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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없는 그림자

 


카라바조(1571~1610), 언제나 나를 긴장하게 하는 이름이다. 나의 뒤통수를 찌릿하게 하는 이름이다. 미술이라는 낯선 이름 아래 나를 늘 깨워온 꿈의 이름이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그의 그림 앞에서 흐느끼던 한 이태리 여대생을 목격한 후 나는 미이라처럼 벌떡, 깨어났다. 미술이 미술 이상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듯이. 그리고 카라바조, 그의 지독한 이름을 늘 기억해야만 하였다.

 

그 아리따운 화가 지망생의 눈물을 추적하기 위하여 나는 오랫동안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서 방황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서 나는 늘, 지독하게 외로웠다. 자연주의라는 둔탁한 이름보다 극사실주의라는 날선 이름으로 부르고 싶은 그의 그림들은 서양미술사가 지닌, 하나의 오묘한 꿈의 해몽과 같은 것이다. 꿈이 현실이 되는 또 하나의 꿈, 현실이 꿈이 되는 또 하나의 현실……바로크의 위대한 이름 카라바조는 어리석은 한 탕자의 이름이다. 로마 뒷골목의 부랑아, 칼을 들고 밤거리를 배회하던 건달, 스스로 디오니소스가 되어버린 술꾼, 결투에 의해 사람을 죽인 살인자, 그리고 떠돌다가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도망자. 이 어리석은 탕자를 위해, 이태리 여대생처럼, 결국 나도 많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영매처럼 나에게 손짓한 것은 언제나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그림이었을 뿐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걸작 ‘엠마오 성찬(1601)’은 비교적 잔잔하게, 인생을 상쇄할만한 그의 진정한 예술혼을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면서 글로바와 다른 한명의 제자는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동행하게 된다. 그러나 미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은 부활을 의심하는 자세로 예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녁이 되어 함께 저녁식사를 할 때 예수는 떡을 떼어 축사를 하는 데, 그제서야 제자들은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고 놀란다, 예수는 사라진다. 신약성경의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그림은 예수를 알아보고 놀라는 바로 그 장면, 바로 음영의 마술사, 카라바조의 그림이다.

수염 없는 예수는 미켈란젤로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카라바조처럼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하였다. 수염없는 예수가 실감나는 것이 바로 이 그림 위대함의 정체다. 그것은 카라바조의 진정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진정성은 모든 믿음과 사랑의 정근(定根)이며 확신과 맥이 닿아있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확신은 노숙자 풍모의 글로바의 옆 모습과 누더기를 걸친 다른 제자의 뒷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별 것 아닌 것 같은 표현은 당시 로마의 미술주류와 어울릴 수 없었던 카라바조라는 천재의 담대한 진정성의 믿음을 보여주기에 넘치도록 충분하다. 교회에서 거부당했던 그의 제단화들이 바로 이러한 불경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교회들은 말쑥하고 성스러운 차림의 제자들만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가장 낮은 신분임을 말해주고 있는 성경을 카라바조는 진정으로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들이 그것을 믿는 것처럼 말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대부분 이러한 진정성에서 오는 것이다. 이태리 여대생의 속절없던 눈물도 그랬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용기는 일종의 순교처럼 아름답다. 명예와 부 대신, 화가로서의 출세와 성공 대신 성경의 진실을 지켜내려던 카라바조의 신념은 ‘왕의 신하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신하’라는 말을 남기고 런던탑에서 처형당한 토머스모어의 신념을 연상시킨다. 그림은 아니 예술은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인간의 마음일 뿐인 것이다. 교회의 화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화가였던 카라바조, 그를 생각하면 나의 뒤통수는 늘 찌릿하다. 그림 속에서 진지하게 자신을 만난 최초의 화가가 아닐까.

 

빛과 흰천들로 어우러지는 성령의 존재는 어둠을 타고 마치 구름처럼 혹은 공기처럼 우리에게 드러난다. 의자를 짚고 일어서려는 듯한 다른 제자와 양팔을 벌리고 놀라는 글로바의 자세는 그러한 빛과 밝음을 감싸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빛과 밝음은 우리에게 쏟아질 것 같다. 탁자 끝에서 떨어질 듯한 과일바구니와 함께 우리를 향해 쏟아질 것 같다. 과일바구니를 떨어질듯한 위태로운 자세로 표현한 것은 아마도 그림의 치솟는 운동감을 가라앉히고 시각적 안정감을 주기 위한 카라바조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의 감동을 전해주기 위한 장치가 되고 있다. 그것이 화가의 의도였건 아니건 우리는 그렇게 느낀다. 음영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벽의 예수의 그림자는 또 어떤가. 축사하는 팔의 그림자와 어우러져 성령의 임재를 강력히 드러내는 어두움이 되고 있다.

로마의 부랑아, 세상의 어둠이었던 빌어먹을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은 왜 이렇게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그의 빛은 우리를 세상의 꼭대기에 세운다. 그리고 그의 지독한 그림자들은 우리에게 세상의 바닥을 치게 한다. 아, 수염 없는 그림자, 그 잔인한 누더기여, 그 너절한 신념이여! (흥분 多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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