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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전함 테미레르 / 터너

hherald 2010.07.17 19:06 조회 수 : 3940

 지는 해, 뜨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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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에서 소개했던 콘스터블의 ‘건초마차’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영국 그림 한점이다. (1838, 내셔널갤러리) 윌리엄 터너(1775~1851)라는 화가가 갖는 이미지는 영국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하나의 기류라고 볼 수 있다. 글쟁이 셰익스피어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말장난을 남긴 영국인의 이름이라면, 그림쟁이 터너는 인간이 그려낼 수 있는 최대치의 붓질을 남긴 영국인의 이름이다, 라는 분위기다. 런던의 코벤트가든에서 한 솜씨 좋은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터너는 무려 2,000점의 그림을 국가에 기증하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방대했던 예술혼을 가장 그럴듯한 방법으로 세상에 알린 화가다. 테이트재단이 젊은 화가들에게 수여하는 영국 최고 미술상 이름이 ‘터너상(Turner Prize)’이라는 것은 그러한 순결한 기증의 거룩한 증표로 볼 수 있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이며 ‘빛의 화가’라고 불리었던 터너는 인상파화가들에게 ‘표현’이라는 화가들의 무기를 인식시켜준 선배였다. 표현은 화가의 고유 권한이라는 당연한 진리는 렘브란트쯤에서야 발화한 철 지난 꽃이지만, 터너야말로 그 진리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만든 위대한 화가다. 빛의 모습을 과장하여 표현하는 그의 풍요로운 질감의 기법들은 낭만이라는 프레임 속에 ‘주관적 풍경화’라는 별명으로 들어 있다. 자연의 무드와 리듬을 극도의 흥분상태로 포착한 그의 작품들은 화가의 감정이  움직이는 살아있는 그림들이다. 자연과 인간 모두가 흥분한 상태의 모습. 그의 방대한 흔적들은 ‘테이트브리튼’에서 오매불망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일단 그의 그림들을 만나게 되면 무장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다른 약속일랑 잡지 말고 가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폐관시간에 쫓기도록 끊임없이 당신에게 말을 걸 테니까.

 

이 그림은 터너의 낭만적 묘사보다는 그림이 지닌 절묘한 방정식 때문에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아무래도 ‘걸작’이라는 호칭은 개인적인 호칭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사회가 부르는 호칭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영국의 수많은 터너 매니어 중에서 이 그림을 터너의 최고 걸작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단체에서 선정한 리스트에서건 이 그림은 터너의 위대한 그림목록의 맨 윗줄을 점령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 그림이 갖는 역사에 대한 반응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림이 추억만을 지향하는 신변잡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얀반아이크가 아놀피니 부부의 증인으로, 화가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감성의 사진사’라는 걸 증명한 이래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묘하고 복잡해졌으니까.

 

바뀌는 시대에 대한 증명사진 같은 그림이다. 넬슨제독의 위대한 승리,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이었던 전함 테미레르가 그 수명을 다하고 폐선 되기 위해 끌려가고 있는 모습, 조그맣지만 강력한 증기선에 의해 다소곳이 끌려가고 있는 순간이다. 배경의 석양은 해뜸과 해짐을 모두 포용한듯 보인다. 산업혁명에 의해 도래된 기계문명의 가속화, 대량생산과 획일화를 향한 그 무의미한 발전에 오버랩 되고 있는 태양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 없다. 그 깊은 표정으로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 상징은 허탈함과 희망을 함께 주기에 충분하다. 연기를 뿜어내며 당차게 구시대의 전함을 끌고 가는 조그만 몸집의 증기선은 새 시대에 대한 희망찬 설계의 모습 같다. 몸집에 비해 커다란 굴뚝은 기술력이라는 힘을 상징하고 있다. 뜨는 해다. 반면 끌려가는 테미레르의 복잡하고 큰 몸집은 화려하지만 왠지 처량해 보인다. 그 역할을 잃어버린 돛대의 전신이 애처롭다. 유령처럼 푸른빛을 몰고 끌려가는 것이다. 지는 해다. 역사는 언제나 지는 해와 뜨는 해를 함께 품고 흘러간다. 지는 해는 뜨는 해를 향해 장문의 편지를 쓰고 사라져 갈 뿐이다. 그 편지를 읽고 안 읽고는 뜨는 해의 특권이다. 자연의 무궁한 섭리 아래 전통은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화려한 석양의 하늘은 오늘도 두 가지를 함께 품고 있다. 경험과 늙음이라는 차가움과 도전과 젊음이라는 뜨거움이다. 영국의 펍(Pub)이 아름다운 것은 바닥에 뒹구는 땅콩 때문도 비터 맥주의 쌉쌀한 맛 때문도 아니었다. 경험과 도전, 차가움과 뜨거움, 젊음과 늙음이 공존하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영국의 펍도 서서히 끼리 끼리 모이는 분위기로 바뀌어가고 있다. 지는 해와 뜨는 해가 함께 만나는 광경을 포착한 위대한 영국인 터너의 통찰력도 이제 그 시효를 다해가는 것 같다. 나까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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