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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백일몽(白日夢) | 고갱

hherald 2010.07.17 18:44 조회 수 : 4974

 

 


독보적 꿈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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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명 속에 안주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은 가끔 유쾌한 반란의 심상(心像)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 위대한 현대문명이 과연 믿을만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되는 그 과거지향적 이미지들은 우리를 잠깐씩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진다. 예컨대 재즈(Jazz)나 블루스(Blues)같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을 통해 발화한 흑인음악이 현대의 대중음악인 팝(Pop)에서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을 생각해 볼 때라든지, 혹은 레비스트로스박사의 ‘슬픈 열대’를 기억하며 서구문명의 적자(嫡子)인 현대문명이 그리 현명한 밸런스만은 아니라고 추정해볼 때라든지, 또는 서부영화를 보며 침략자들이 착한 주인공이 되는 아이러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랄 때, 우리는 현대가 정답이 아니라는 허무한 자기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문명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용기는 없지만, 돈 안 드는 우리의 상상력만이라도 이 답답한 현대 서구우월주의의 잔인한 전쟁터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상상력의 휴양지 같은 화가중의 하나가 후기인상파로 분류되는 프랑스 화가 고갱(1848~1903)이다. 그의 그림 중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코톨드미술관’에 소장된 “백일몽(1897)”을 들 수 있다.

 

고갱은 서양미술사가 축적해온 미에의 관념을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동시대 인상파들을 통해 미술의 미가 독선적 정형(定型)으로 결코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았고, 혼란스러운 자기정체성을 새롭게 찾아보기 위해 타히티 같은 상대적 미개사회로 기꺼이 뛰어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그의 대표작들은 그런 자기 확인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서양미술이 만들어낸 테크닉이나 고정관념이란, 가깝게 동양화에 익숙한 우리들의 시각으로만 보더라도 얼마나 독선적인 것인가. 기교를 위한 기교가 판치고, 평가의 기준은 맹목적인 것이 되었으며, 예술의 기본기인 개성은 비기(?技)처럼 숨겨야만 하였다. 서양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미술은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야만적인 독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서구우월주의 시각이 강요하는 규범 속에 예술마저 고립되어 버린다면 인간성 상실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원시사회 혹은 미개사회가 지니고 있는 상대적 풍요로움은 서구가 이해하지 않으려 할 뿐, 분명히 존재하는 상대적 무엇이었다. 주식거래인을 그만 두고 서른 다섯에 전업화가가 된 고갱은 그런 위기를 감지한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 ‘Te Rerioa’는 타히티 말로 ‘악몽’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백일몽(daydream)’이라고 부르고 있다. 타히티의 평범한 가정집 사랑방쯤에 두 여인이 한가롭게 앉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들의 여유는 아마도 얌전히 낮잠에 빠져든 아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턱을 괴고 앉은 웃통 벗은 여인의 표정은 어디서 본듯한, 이 그림의 유일한 낯익은 모습이다. 나머지는 어린 시절 외갓집쯤에서 본 풍경인 듯 하면서도, 온통 낯설다. 특히 이상한 그림으로 장식된 벽은 그 낯섦의 근거가 되어주기에 충분하다. 평면적으로 처리된 문밖으로는 한가로운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다. 표현된 모든 것들에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서구문명의 시각은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그저 고갱이 바라본 낯설고 덜 자란 문명의 모습을 얻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저히 그녀들이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것을 상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어떡하면 자식들을 일류대학에 보내 당당한 이 시대의 일꾼이라는 명분 속에 잘 먹고 잘 살게 해줄까, 는 아닌 것 같다. 어떡하면 재개발될 동네에 집을 하나 헐값에 사서 뻥튀기할까, 는 더더욱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모른다. 이 세상이 아니면 어떤 세상이 펼쳐지는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고갱은 모르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서양미술의 테크닉을 얌전히 포기하였다. 그리고 미개사회의 예술을 그림 속 소품으로 기꺼이 활용하여 시작과 유사한 순수성을 추구하고 있다. 낮잠 자는 아기가 꾸고 있을 꿈까지를 상상하면서 꿈이란 시대와 사회가 주는 불순물 섞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꿈은 자신을 자신이게 만드는 유력한 개성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누구와도 동질성으로 묶일 수 없는 고유하고 유일한 것. 그것이야말로 미술이 보내고자 하는 메시지의 첫 페이지다. 문화마저 기계가 찍듯 획일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나만의 꿈이다. 남과 다를수록 좋다. 쇠사슬을 차고 끌려가면서도, 얻어 맞거나 목숨을 빼앗길까 두려워 차마 반항하지 못하는 노예들. 고갱은 그러한 난감한 상황 속에서 추구해야 할 정신적 반항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여 준다. 남이 알아주건 말건 나만이 꿀 수 있는 꿈, 미술은 그런 독보적인 꿈을 향해 열려있는 유쾌한 심상이다. 가족을 떠나 예술과 자신을 찾으려는 열정으로 미개지를 떠돌던 빵점 짜리 아빠 고갱, 그의 색감은 그러나 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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