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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해바라기 | 고호

hherald 2010.07.17 18:40 조회 수 : 2206

행복한 미치광이 열 다섯 마리

 

현대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쳐 있다. 그 미친 정도에 따라 혹은 미친 방향에 따라 구별될 뿐이다. 누구든, 본인이 미쳤다는 걸, 싫겠지만, 인정해야 한다. 세상의 공기에 의지하는 모든 인간들이 미쳤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세상의 미친 공기가 온전히 회복될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버티면서 일취월장 병들어 가고 있다.

 

미친 현대인들의 직계 선배 중에 고호(1835~90)가 있다. 현대 미술의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이상한 화가. 흔히들 슬픈 화가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게 못마땅하다. 그가 슬픈 화가라면 우리들이 고호보다 행복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가? 고호의 슬픔을 온전히 바라보는 자는 적어도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덜 떨어진 짧은 인생역정을 부러워할 줄 아는, 생의 가벼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부와 명예보다 값진 열정에 소스라치게 놀라본 경험도 없이 어찌 고호를 슬프다고 부른단 말인가? 가난해서? 일찍 죽어서? 그것도 자살로? 자신의 귀를 잘라서?..... 어떤 것도 고호의 행복한 열정에 비하면 초라한 필요조건이었을 뿐이다. 고호가 존재하는 이유는 열정의 방향을 잃어버린 현대를 일깨워주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고호는 행복의 이상한 터널 하나를 파놓고 일찍 퇴근한 ‘열정’의 전도사였다.

 

세잔, 고갱과 마찬가지로 고호는 어린 시절부터 아카데믹한 미술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어느 순간 폭발적인 열정에 이끌려 화가가 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전통적 서양미술에 대한 신뢰나 자부심이 뿌리 깊게 자리잡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 이것이 그를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성에 눈뜨게 한 충분조건이 되었으니, 특급 아이러니다. 후기 인상파라는 공포의 외인구단에 의해, 서양미술이 수백 년 책임지고 쌓아온 전통과 명성은 하루 아침에 노인정 바둑이 된 것이다. 이창호라는 괴물 소년이 등장했을 때 평생 바둑만을 연구하던 일본의 대가들이 죽고 싶었던 것처럼.

 

고호 그림들은 미켈란젤로나 렘브란트, 피카소의 그림들처럼 한 인간의 탐구를 다양하고 폭넓게 보여주는, 통달한 대가의 풍모에서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양한 변용을 보여주기에 그의 생애는 너무 짧고 긴박했다. 고호는 대가라고 부르기보다는 미친 화가로 불러야 한다. 그 ‘미침’이 행복으로 환원되려면 대략 어떻게 미쳐야 하는가를 생생히 보여준 인물이 바로 고호다. 물론 그림으로 보여주었다.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과 외로움과 행복과 꿈과 사랑과 불완전함을 모두 보여주었다. 그의 그림에 세계가 열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호가 살아 생전 명예도 부도 얻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코딱지 동생만큼도 없다. 그 알량한 명예와 부가 자신을 더 비참하고 외롭게 만들기 전, 그는 서둘러 퇴근한 것이다. 행복의 잣대가 부와 명예가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면서도, 이 시대의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고호를 안타깝다고 설레발을 떤다. 살아 생전 평가를 받지 못한 예술가들을 애석하다고 한다. 빌어먹을, 나는 당신들이 더 안타깝다. 이 시대의 지도자, 선생, 재벌, 삼촌, 외사촌당숙. 사돈의 팔촌 어르신, 선배 여러분! 

 

내셔널 갤러리의 간판 스타 “해바라기(1888)”는 고호가 행복한 미치광이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노란집(Yellow House)’을 방문하는 고갱을 위해 그린 해바라기 연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빈센트라는 그의 큼직한 서명. 그는 두 점의 해바라기에만 서명 했을 뿐이다. 열 다섯 송이의 해바라기들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행복에의 열정으로 노랗게 불타고 있다. 어떤 것은 아직 어리고, 어떤 것은 매우 늙었고, 어떤 것은 지쳐 있고, 어떤 것은 의욕으로 튕겨져 나갈 듯 하다. 날카롭게 날 선 그들의 집념은 화가의 열정과 만나,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그 폭발은 서양미술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들어, 형태를 기꺼이 왜곡시키고 있다. 세잔의 탐구와는 다른 각도의 반역인 셈이다. 그의 모반(謀反)은 화가의 완전한 감정전이(感情轉移)를 꿈꾸는, 집중력을 지닌 광기였다. 그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프랑스 화가 몬티첼리(1824~1886)가 프로방스지방을 오렌지색과 황록색으로 물들였듯이, 고호는 친구가 머물 방의 꿈을 도배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분신인 해바라기를 노란색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손오공처럼 훅, 불었다. 그러자 그에 화답하듯 열 다섯 송이 해바라기는 기꺼이 열 다섯 마리 해바라기가 되어 주었다.

 

지금껏 나와 함께 이 그림을 본 사람들 중에는 눈물을 보인 여자가 세 명 있다. 첫번째 어느 아줌마,   멀리서 보라고 권했더니 눈이 아프다며 슬피 울었다. 두번째 어느 노처녀, 고호의 비참했던 생애가 안스럽다며 서럽게 울었다. 세번째 어느 여대생, 고호의 치열한 열정이 감동이라며 펑펑 울었다.  물론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당신보다 슬픈 사람은 없다. 그 슬픔 속에서 헤어나오는 길은 오직 목숨과 등가인 ‘열정’뿐이라고, 행복한 미치광이 고호는 열다섯 번씩이나 부르짖고 있다. 노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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