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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폴리베르제르의 바 | 마네

hherald 2010.07.17 18:34 조회 수 : 7999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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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챔버스가 설계한 신고딕양식의 18세기 건물 서머셋하우스는 런던 시내의 이례적인 웅장한 건물 중 하나다. 런던에는 큰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아마도 극작가 밴존슨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경지에 가깝게 이른 자일 것이다. “런던에 싫증을 느낀 사람은 인생에 싫증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서머셋하우스 안의 빛나는 미술관 ‘코톨드미술관(The Courtauld Gallery)’을 가끔 들릴 것이다. 작은 출구에 기묘한 계단을 지닌, 마치 피난중인 화랑같은 그 조촐한 미술관이 세계에서 가장 알찬 인상파 그림의 보물창고 중 하나라는 사실은 런던의 미를 가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기적의 모습에 가깝다. 그 기적의 증빙서류처럼 강렬히 빛나는 그림이 인상파의 리더였던 마네(1832~1883) 말년의 걸작 “폴리베르제르의 바(1882)”다.

 

파리의 유명한 극장식당 폴리베르제르의 바를 바라보는 마네의 시선이다. 챨리채플린부터 엘라핏제랄드, 쟝가방, 에디뜨삐아프, 그리고 엘튼존까지 공연한 바 있는 백 년 넘은 전통을 지닌 무대의 바를 그리고 있다. 많은 비평적 화제를 지닌 그림답게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는 그림이지만, 마네는 이 그림을 남기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 그림은 마네 인상주의의 완성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그림을 화제의 중심에 서게 만든 것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설픈 구성이다. 그 어설픔은 주인공 바텐더 뒤의 배경 거울 때문에 형성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들은 벨라스케스의 록비비너스(Rokeby Venus, 1647~51)에서처럼 전혀 맞지 않는 각도의 형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거울에 반영되는 혼잡한 극장의 모습 오른편에 자리한 여인의 뒷모습이 그 문제의 핵심이다. 주인공 바텐더의 뒷모습이라면 도저히 각도가 맞지 않는다. 마네의 친구로 추정되는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보이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카운터가 보이지 않는다. 거울에 반사된 술병들도 겨울 밖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심각한 착각처럼 왜 이렇게 어설프게 그렸을까? 

 

인상파의 가장 주된 업무는 보이는 대로 그리겠다는 의지표현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맞다면, 수백년 서양미술이 쌓아온 미의 추구란 인간의 눈을 속여온 마술의 트릭 같은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정확히 보일 수 없는 원경을 정확히 표현해내고 보이지 않는 것 까지를 친절히 그려온 전통, 그 전통은 분명 인간의 눈을 기만해온 역사다. 인간의 눈은 초점이 맞는 일부분만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초점을 벗어난 부분의 모습은 그 형태를 어림짐작해야 할 정도로 뿌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인간의 눈에 중심을 맞춘 그림은 사물의 본질보다는 화가의 눈이 찍어내는 정직한 사진과 같은 것이다. 초점 흐리게 보여지는 사물에 대한 표현에 집착한 화가가 마네다. 그러나 그러한 인상파의 입장만으로는 설명되기 힘든 것이 각도가 맞지 않는 거울 속의 여인 모습이다.

 

마네는 현실과 다른 또 하나의 가상현실 즉 상상의 부분을 거울을 통해 채워 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거울 속의 모습은 극장의 현실이다. 공중 곡예사의 발이 보이고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관객들의 뿌연 모습이 보인다. 그 현실 속에서 바텐더는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다. 거울 밖의 모습은 바텐더의 현실이다. 그녀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은 일상으로서의 극장 속에 서 있다. 그녀에게 극장은 관객들처럼 즐기며 먹고 마시기 위한 여흥의 장소가 아니고,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고되게 서서 일하는 삶의 현장으로서의 무대다. 따라서 그녀는 지극히 무표정한 모습으로 감정을 유보시킨 채 서 있다. 그녀가 맞서고 있는 것은 거울 안의 모습, 즉 그녀가 속해 있는 현실이다. 이 그림은 일상 속의 바텐더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의 배경 거울이 비쳐내는 그녀가 속한 방대하고 복잡한 현실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요” 이 그림을 보며 이상의 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네 이력에는 괴상한 부분이 하나 있다. 부잣집 아들로 평생 경제적 어려움 없이 살았던 그의 인생에 이상한 여자가 한 명 등장한다. 1863년 마네와 결혼하는 수잔리노프라는 네덜란드 태생의, 마네와 마네 동생의 피아노 선생이었던 여자다. 그녀는 마네 아버지의 정부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1852년 레온이라는 아들을 출산하는 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확실치 않다. 걸작 ‘발코니(1868)’를 비롯한 몇 작품에 등장하는 바로 그 소년이다. 마네 아버지가 죽은 후 리노프는 마네와 결혼하였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들의 비밀. 마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아야 하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괴상한 비밀이 하나쯤 있다. 마치 거울 속의 왼손잡이 같은 그 모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 괴상한 모습을 이해하는 것은 나의 현실일 뿐, 세상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괴리감 때문에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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