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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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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를 짝사랑한 굉음€

 

오규원이나 황지우, 박남철의 웃기는 시들을 기억한다. 80년대 폭염의 대한민국이었다. 서슬 퍼렇던 박정희 독재정권의 사상누각이 권총 하나로 간단히 무너지고 꿈에도 그리던 봄날은 오는가?를 기대했던 백성들을 다시한번 절망케하던 시절이었다. 스님 역할을 주로 하던 어느 중견 탤런트 닮은 육군 장군 하나가 나라를 일렬종대로 헤쳐모여시키던 시절이었다. 그 폭염의 타는 목마름 속에서 위의 시인들은 뻔번하게도 웃기는 시들을 쓰고 있었다. 광고전단지의 구인광고나 만화의 대사들을 시 속에 적나라하게 나열한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독 한국과 스리랑카가 절대 터부시하는 전라의 헤어누드를 연상시키던 그 웃기는 시들은 '해체시'라는 명함을 파고 우리사회 속에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우울하게 침잠되었다. 숙명적으로 참여가 아니면 순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그 한국 문학 흑백의 시절, 그 흑백이 꼴도 보기 싫어 문학을 포기한 나같은 인간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를 두고 뭔 예술지상주의냐는 참여파와, 문학의 속성은 사회의 핏줄 속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재된 반역이 문학의 소명이라는 순수파, 나는 섞이지 못하는 둘 다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솔직히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반은 맞는 말이다. 반만 맞는 말이다. 오늘 소개하는 미국의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97)의 그림은 그런 우리의 웃기는 시들의 원조국밥이라고 할 수 있다.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의 원조가 영국 채널 4번의 '빅브라더(Big Brother)'인 것처럼.

 

런던 게이문화의 지도자급 가수 죠지마이클이 활동했던 팝듀오 '꽝!(Wham!)'보다 강력한 이 그림의 제목은 "꽈앙!(Whaam!)(1963)"이다. 의성어다. 폭발음이다. 세상을 깨우는 폭발음이다. 환희의 굉음이다. 아군 전투기가 꽈앙!,하며 상대 전투기를 명중시키는 순간이다. 승리의 순간이다. 쾌감의 순간이다. 그 순간은 물론 만화에서 가져 왔다. 수많은 만화 속의 방들 중에서 단 두칸을 가져와 예술이라고 우겼던 이 뻔뻔한 남자 리히텐슈타인은 생각할 수록 강력한 미술계의 전사였다. 터프가이, 그리고 독설가였다. 그의 독설은 이를테면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는 행위에 가깝다. 조용한 관중들을 선동하는 훌리건의 부르짖음과 유사하다. 무얼까? 리히텐슈타인이 깨우고 싶고 선동하고 싶었던 이 현대라는 거대하고 유치한 연못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판을 깨버리고 싶은 비세의 바둑판같은 이 치졸한 현대는.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현명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빌리자면 여가를 활용하는 놀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당연히 작가의 만족을 전제로 한다. 현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역사의 무게만큼 다양하고 다채로운 놀이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화가도 인간이라는 진리를 전제한다면 현대 화가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다양해지는 놀이문화만큼이나 폭넓어야 정상이다. 오백년전 화가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법으로만 만족해야하는 것이 예술이라면 그 심각한 예술의 정체성은 각종 정신병을 유발하기 십상일 것이다. (실제로 약간 이상해 보이는 예술가들은 예술의 정체성에 따른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의 형식이 다양해지는 방법에는 새로운 놀이판의 개발도 있겠지만 다양해진 놀이들을 끌어안고 서로 용도변경하는 방법도 있다. 크로스오버, 히브리드, 포스트, 네오, 프로토 등은 그런 예술의 확장을 부르는 망측한 이름들에 다름아니다. 예술은 보다 하위의 개념이라고 경시하던 매체들에게 구애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광고나 만화에서 이미지를 가져온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은 그러한 예술의 사교성과 관련 있다. 인쇄라는 혁명적 표현법에 대한 예술의 짝사랑, 그래서 이 그림처럼 '망점(Dot)'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대를 '허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또하나의 근거가 바로 망점이다. 인쇄도 텔레비젼도 망점들이 모여 그림을 형성하도록 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망점이라는 색점의 교란을 통해서만 연예인들의 유치한 모습을 보는 우아한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인쇄와 만화라는 대량생산의 도박 속에서 예술의 요소를 찾아내 '낯설게하기'라는 새로운 예술이론에 접목시킨 리히텐슈타인은 현대의 속성을 파악하고 그 기이한 특성을 집어낸 셈이다. 쉐라의 점묘법에 대한 현대의 대답같은 그림이다.

 

이 웃기는 두폭화를 보며 전쟁을 읽어내건, 승리의 순간을 생각하며 감격하건, 사회의 전투성을 생각하건, 벌지 못하면 저능아로 전락시키는 돈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떠올리건, 어린 시절의 눅눅한 장마철 만화가게를 떠올려 보건, 사랑의 승리를 유추해내건, 폭발적 섹스의 쾌감을 염두에 두건, 어리석은 국가주의를 생각하건, 황홀한 순간을 그리워하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다. 화가가 획득한 형식의 자유가 확장되어 우리의 삶에게 허락한 소박한 선물이다. 이 그림을 보고나서 '테이트모던'의 커피숍 베란다에 커피한잔을 들고 서있는 당신 앞에는 런던의 경이로운 모습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무엇인가가 떠오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해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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