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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감성과 상상력의 사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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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충혈된 눈으로 들여다 본 그림들이 있다. 보고 또 봐서 친구 집 거실의 달력처럼 익숙한 그림들이 있다. 이야기하고 또 얘기해서 어린 시절 도깨비 이야기처럼 더 이상 무섭지 않은 그림들이 있다. 듣고 또 들어서 비틀스 노래처럼 고저장단을 잃어버린 멜로디 같은 그림들이 있다. 네덜란드 최초의 거장 얀 반 아이크(1395~1441)의 “아놀피니 초상화(1434)”가 그런 그림이다. 1842년 팔려온 이래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미스터리와 품격유지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이 그림은 수많은 화제와 구설수와 스캔들을 지닌 초특급 명화답게 이름도 다양하게 불리어 왔다. ‘아놀피니 초상화’, ‘아놀피니의 약혼’, ‘아놀피니의 결혼’, ‘아놀피니 부부의 초상화’……골라잡아 어느 것으로 부르던지 그림의 혈액형이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증명되지 않은 알리바이를 위하여 단지 ‘아놀피니 초상화’로만 부르고 싶다.

 

미술사의 비중 높은 주역의 한 명인 반 아이크는 ‘유화의 창시자’라는 배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색료를 엉기게 하던 용매로 계란 대신 기름을 사용한 작은 발명은 미술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림을 보다 우아하게 감쌀 수 있는 유연하고 신축성 있는 신소재의 개발이었던 셈이다. 물론 그런 발명이 완전히 반 아이크 개인의 성과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목판에 유화기법으로 그려진 그의 대표적 초상화인 이 그림은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유쾌한 금자탑을 쌓은 그림이다. 그 금자탑은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을 뒤엎어버린 혁명의 다른 이름이다. 화가라는 보직이 필요성에 의해 좌우되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 필요성을 창출할 수 있는 ‘제3의 눈’이라는 인식은 분명 역사상 모든 화가들의 명함을 바꿀만한 사건이었다. 단순한 ‘쟁이’로서 시킨 대로 그려내는 역사의 기록자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주관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성이라는 무기를 지닌 무서운 자들이라는 깨달음은 거의 이 그림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놀피니라는 이탈리아 거부의 결혼서약쯤으로 짐작되는 이 장면은 그러한 깨달음을 구석구석 감추어두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이 갖는 미스테릭한 요소들은 서양미술사의 승리를 향해 열려 있다. 그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가운데의 거울을 중심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거울 안에 보이는 네 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은 화가 자신일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 위에 쓰여진 라틴어 “1434년 얀 반 아이크 여기 있었노라”는 그 존재에 대한 섬뜩한 확인이다. 카메라가 없던 중세 시절 화가들에게 부여된 이러한 이미지 기록자로서의 임무는 현대인들이 상상하기 힘들만큼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역사의 증인이 보여주는 꼼꼼한 시선들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극도의 단축으로 표현된 창문으로 감질나게 보이는 화초 모습, 스테인드글라스와 블라인드가 보여주는 우아한 부의 윤택과 삶의 안락함에 대한 기대감, 오렌지가 보여주는 정갈한 식성의 추구, 기막힌 질감으로 처리된 샹들리에의 외롭게 빛나는 하나의 촛불이 보여주는 정절과 충심의 의지, 의도적으로 교묘히 배치한듯한 두 켤레의 슬리퍼가 보여주는 사랑의 순결함, 고도의 테크닉으로 표현된 털복숭이 강아지가 나타내는 충성심, 벽에 걸린 묵주가 은밀히 보여주는 신앙심, 매달린 작은 솔이 연상시키는 청결함에의 의지, 엑조틱한 취향을 보여주는 터키산 카펫……모든 것들은 화가가 바라본 현실이었을 뿐이다. 서약을 하는 듯 혹은 누구에게 신호를 보내는 듯한 아놀피니의 오른손과 속도 위반하여 임신한 것으로 오해 받았던 신부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왼손마저도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듯 하다. 이 모든 장면은 1434년 바로 그날 얀 반아이크가 그곳에 있었기에 가능해진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의 모든 동작과 소품과 배경은 우리가 사실로 믿고 싶은 반 아이크의 상상력일 뿐인 것이다. 사과 대신 오렌지를 그렸건 파란 침대를 붉게 그렸건 몇 개의 빛나는 촛불 중 하나만 그렸건 그것은 이미 반 아이크의 감성에 의해 새롭게 통제되고 걸러진 모습일 뿐이다. 반 아이크라는 카메라는 렌즈와 셔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수위와 상상력의 면적을 지닌 살아있는 카메라였던 것이다. 화가가 단순한 역사의 기록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거기 있다. 생명이 덧씌워진 카메라이므로.

 

이 그림 미스터리는 1997년에 다시 제기되었다. 그림 속의 커플이 결혼한 것은 그림에 표기된 1434년에서 13년이 더 흐른 뒤, 그러니까 화가가 죽은 6년 후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아놀피니와 그녀의 첫번째 부인의 모습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첫번째 부인은 그림이 그려지기 일년전인 1433년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놀피니 위의 켜진 촛불은 생존을, 부인 위의 꺼진 촛불은 부재를 의미한다는 추정도 제기되었다. 어느 것도 속시원한 그림의 알리바이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증명되지 않은 이 그림의 알리바이는 감성과 상상력을 지닌 사진기만이 블랙박스를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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