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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막연한 아름다움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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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대개 불가사의하거나 불가해한 면을 지니고 있다. 표현하기 애매하거나 이름 지어 부르기 지극히 불편한 부분, 그것은 신비를 간절히 원하는 인간들에게 더 없이 간지러운 입방아의 대상이 되어준다. 인간의 손으로 인간이 만든 붓을 잡고 그렸어야 맞는데,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도 비상하거나 비범하거나 비장하거나 비통한 그림들…

그래서 나는 명화들을 ‘필연과 우연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블루스’라고 부르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여기서의 블루스란 우울함보다는 기적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피라미드나 모솔리움의 신비를 이야기하듯 수수께끼 속에서 어찌 헤어나올 수 있겠나 싶은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기적의 초상화라고 불러도 좋을 그림이 프란스할스의 “웃는 기사(1624)”다. 런던의 수많은 초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 그 불가사의한 매력은 그것이 우연이건 필연이건 애매한 아름다움의 전형으로서 우리를 깊이 모를 신비의 세계에 머물게 하여 준다. ‘월리스콜렉션’의 값진 보석이다.

이런 그림 앞에서 검색하면 단번에 우르르 쏟아지는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시간낭비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독자 제현께서 본 허접 칼럼을 어렵다고 지적해주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일단 지식만을 나열하지는 않았다는 지적으로 받아들인다. 마우스 한번 움직이면 나타나는 현상(지식)에만 이 아까운 지면을 쓰기는 죽기만큼 싫다. 그 경도가 어떠하건 나만이 느끼는 본질(생각)을 쓰는 것이 이십일 세기 정보화시대의 그림 감상법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한 안내서만이 존재해온 대중미술비평의 공동화 현상을 증오하는 한 인간이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번역은 통찰력의 손발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통찰력의 정수리는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역시 굳게 믿고 있으며… 그만. (변명多謝!)    

 

프란스할스(1580~1666)는 네덜란드 황금시대(Dutch Golden Age)를 대표하는 초상화가다. 그의 초상화들이 주는 놀랍도록 신선한 표정묘사와 자연스러운 포즈들은 사백년전 네덜란드인들의 삶을 즉물적이면서도 진지하게 가벼우면서도 위풍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인물들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너무도 정확해서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연의 순간을 포착하여 찍은 사진을 연상시키는 마력이 있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나 로버트프랭크의 ‘미국인들’ 같은 걸작 사진들이 모두 그의 초상화가 만들어낸 부록같다는 느낌에 오랫동안 갇혀 지낸 적이 있었다. 사진도 초상화도 모두 인간의 눈이 존재하기에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이 할스의 그림 앞에서는 너무도 절절하다. 카메라라는 것은 오로지 할스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이 어리석은 환상의 팔십프로는 프란스할스의 고감도 필력에서 오는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 그리고 믿을 뿐이다.

 

이 그림의 제목 ‘웃는 기사’는 빅토리아시대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짜 기사인지 아닌지 모를 이 남자의 표정에 대해서는 추측과 망상이 난무하였다. 웃는 모습인지 아닌지, 그림 우상에 씌여진 주인공의 나이 26살은 진실인지, 등속의 수수께끼들이다. 나는 웃는 모습이라고 보는 편이다. 아주 최소한의 웃음을 마지못해 살짝, 도도하게 살짝, 당당하게 살짝, 마치 수십년 활동한 노련한 연극배우처럼 살짝,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라고 보는 편이다. 나이답지 않은 넓은 이마와 희극배우의 분장 같은 곤두선 수염은 그 살짝미소를 살인미소로 환산해내려는 중이다. 지나치게 밝고 붉은 입술, 돋보이는 피부와 혈색도 그렇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정밀 묘사된 옷감의 표면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되어 준다. 약간 의도적인 듯 약간 어색해 보이는 어깨의 자세는 우리에게 일말의 허탈감까지 준다.

저런 어색한 자세에서 어찌 저런 자신감 있는 표정이 나온단 말인가. 배경의 붓자국들은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곡예를 하는 할스의 직업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 신비의 정점에 다다른다. 바로 저 못돼 먹은 눈이다. 바로 저 너무도 자신감으로 뭉쳐진 단단한 눈이다. 바로 저 나도 저런 표정으로 살고 싶어진다,는 동경의 느낌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정지된 눈동자다. 바로 저 모든 감상자와 눈을 맞추고 있는 눈이다. 바로 저 모든 각도와 눈을 맞추고 있는 눈이다.
바로 저 모든 인류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 같은 못돼 먹은 눈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라고 황당해하면 당신은 지는 것이다. 한낱 그림 한 폭에 지는 것이다. 언제나 내가 이 그림 앞에서 강조해 온 행동지침은 ‘정신 차리자!’ 였다.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 이 신비스러운 사백년 전 어느 젊은 친구의 미소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와우, 그것이 이 옛날 그림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그 두려움은 아름다운 여인이나 엄청나게 큰 돈다발을 보고 느꼈던 젊은 날의 그것과 유사했다. ‘살아야겠다’는 명제를 머리 속에서 번쩍이게 하는 막연한 아름다움. 월리스콜렉션에 갈 때 마다 반드시 이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다. 그림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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