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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쿠르브부아의 다리/ 조르주 쇠라

hherald 2010.07.26 16:07 조회 수 : 14400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37
쿠르브부아의 다리/ 조르주 쇠라
Bridge at Courbevoie/ Georges Seurat
 

 

 

그림.jpg 차갑게, 안경을 벗고

 

요절한 예술가들의 짧은 행적은 늘 야릇한 호기심을 동반한다. 치열한 열정만을 보여주고 일찍 퇴근해버린 그들은 보다 광범위하고 깊은 상상력을 감상자들에게 제공하곤 한다. 그들의 비자연적 (평균수명에 훨씬 못 미치는) 짧은 생은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까지가 인생인지 헷갈리게, 예술과 삶의 경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짧은 생들에 이끼처럼 덕지덕지 낀 예술혼들은 마치 비경(秘境) 속에 위치한 정자와도 같다. 그 정자에 앉아 그들의 젊은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다소 잔인해 보일 때도 있지만, 세상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황홀한 아름다움의 풍경이다. 후기인상파, 그 중에서도 신인상파(Neo Impressionism)라는 현대미술 지침서의 대표인 쇠라(1859~91)도 그렇다. 그의 치열한 탐구가 어떻게 현대미술과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수록 그의 짧은 생은 무장 신비로운 비경 속에 자리잡는다. 인상파의 혁혁한 업적을 즉시 호흡한 세대인 쇠라는 그것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그는 인상파의 모호한 방법론에 어떻게 치밀한 질서와 규칙적 방법을 적용시킬 것인가를 연구한 화가다. 세잔이 전통적 소묘법과 싸우며 그 화두를 오랫동안 붙들었다면, 쇠라는 아예 새로운 작법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신하였다. 흔히 점묘법(pointillism) 혹은 분할주의(Divisionism)로 대변되는 쇠라의 화풍은 당시로서는 단연 새로운 것이었다. 쇠라는 슈브륄(Chevreul)등의 과학자들이 수행한 빛과 색채에 관한 연구를 참고하여, 원색 망점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색감의 새로운 경험을 서양 미술사에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들은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나 ‘아니에르에서 멱감는 사람들’처럼 새롭고 차가운 분할주의 속에서도 정감과 낭만이 넘치는 것들이지만, 런던 코톨드미술관에 소장된 ‘쿠르브부아의 다리(1886~87)’처럼 차갑고 냉철한 화풍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쇠라가 추구했던 화풍의 가장 발전된 단계에 가까운 그림이다.
점묘법은 원색의 망점들이 형성하는 색감과 형태를 표현의 주무기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와 윤곽의 불분명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 바로 이 그림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실물을 보고 나면 그 모호한 형태와 윤곽이 형성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적잖게 놀라게 된다. 현대미술의 놀라운 파격을 수없이 경험한 우리가 그렇다면, 백여 년 전 감상자들의 놀라움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대미술이 그토록 그리워하게 되는 ‘본질탐구’에 대한 하나의 답안지를 얌전히 적어두고 사라진 화가인 것이다. 뿌옇고 모호한 다리를 바라보는 화폭, 과학발전을 의미하듯 먼 공장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나고 있다. 두 사람은 강가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돛단배들의 돛들은 굴뚝, 나무, 사람들과 함께 수직선을 형성하며 다리나 배의 형상이 보여주는 수평선들과 직각으로 만나고 있다. 망점을 통해서 형성된 중간 색들은 뿌옇지만 색채원근을 보여주고 있다. 형태를 형성하는 선들의 자리를 점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전통적 사실 묘사와는 다른 방법으로 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순간의 인상은 인상파들의 그것보다 보다 해체적이고 실험적이며 인위적이다.
그가 색채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나 그의 그림이 과학적이라는 세간의 평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망점을 통해서 분할된 색들이 형성하는 색감을 추구한 그의 작업이 인상파의 순간포착을 뛰어넘는 본질추구의 한가지 전형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작업이 과학에서 섭취한 것은 하나의 동기일 뿐, 표현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은 예술에 영향을 주지만 그 영향은 예술적 방법이 아니면 표현되기 힘든 것이다. 쇠라의 과학적 탐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거가 되어줬다는 의미에서 대단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신의 예술인 자연을 모방하던 서양예술에 비자연적인 모습을 하나 얹어주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두 가지 예술의 방법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자에 수백 년 탐닉하던 서양미술이 후자의 의미와 중요성을 혹독하게 깨달은 것은 팔십프로 ‘인상파’라는 외개인들 때문이다. 인상파를 통해 자연의 모방이 주는 결핍과 원형에 대한 인간들의 지독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기인상파라는 구원투수들은 그 지독한 사랑을 몸소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전부 투신한 선구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하고 안타까운 자가 바로 쇠라다. 그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어떤 변용을 보여주었을지, 그가 과학에서 훔쳐온 차가운 표현법들이 어떤 경로로 현대미술을 성형하였을지 무척 궁금하기 때문이다.
쇠라의 이 서늘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숨겨놓은 수많은 망점들 만큼 다양했던 내 인생의 망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 같다. 안경을 벗고 어느 강변에 서있었던 그 어느 날 나의 시간이 떠오른다. 그것은 아련하고 뿌옇지만, 오직 예술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차가운 시간여행의 기차표다. 

 

차갑게, 안경을 벗고

 

요절한 예술가들의 짧은 행적은 늘 야릇한 호기심을 동반한다. 치열한 열정만을 보여주고 일찍 퇴근해버린 그들은 보다 광범위하고 깊은 상상력을 감상자들에게 제공하곤 한다. 그들의 비자연적 (평균수명에 훨씬 못 미치는) 짧은 생은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까지가 인생인지 헷갈리게, 예술과 삶의 경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짧은 생들에 이끼처럼 덕지덕지 낀 예술혼들은 마치 비경(秘境) 속에 위치한 정자와도 같다. 그 정자에 앉아 그들의 젊은 작품들을 감상하는 것은 다소 잔인해 보일 때도 있지만, 세상에서 구하기 쉽지 않은 황홀한 아름다움의 풍경이다. 후기인상파, 그 중에서도 신인상파(Neo Impressionism)라는 현대미술 지침서의 대표인 쇠라(1859~91)도 그렇다. 그의 치열한 탐구가 어떻게 현대미술과 연결되는지를 알게 될수록 그의 짧은 생은 무장 신비로운 비경 속에 자리잡는다. 인상파의 혁혁한 업적을 즉시 호흡한 세대인 쇠라는 그것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었다. 그는 인상파의 모호한 방법론에 어떻게 치밀한 질서와 규칙적 방법을 적용시킬 것인가를 연구한 화가다. 세잔이 전통적 소묘법과 싸우며 그 화두를 오랫동안 붙들었다면, 쇠라는 아예 새로운 작법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신하였다. 흔히 점묘법(pointillism) 혹은 분할주의(Divisionism)로 대변되는 쇠라의 화풍은 당시로서는 단연 새로운 것이었다. 쇠라는 슈브륄(Chevreul)등의 과학자들이 수행한 빛과 색채에 관한 연구를 참고하여, 원색 망점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색감의 새로운 경험을 서양 미술사에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들은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나 ‘아니에르에서 멱감는 사람들’처럼 새롭고 차가운 분할주의 속에서도 정감과 낭만이 넘치는 것들이지만, 런던 코톨드미술관에 소장된 ‘쿠르브부아의 다리(1886~87)’처럼 차갑고 냉철한 화풍의 극단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쇠라가 추구했던 화풍의 가장 발전된 단계에 가까운 그림이다.
점묘법은 원색의 망점들이 형성하는 색감과 형태를 표현의 주무기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형태와 윤곽의 불분명을 초래할 소지가 있다. 바로 이 그림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실물을 보고 나면 그 모호한 형태와 윤곽이 형성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적잖게 놀라게 된다. 현대미술의 놀라운 파격을 수없이 경험한 우리가 그렇다면, 백여 년 전 감상자들의 놀라움을 미루어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현대미술이 그토록 그리워하게 되는 ‘본질탐구’에 대한 하나의 답안지를 얌전히 적어두고 사라진 화가인 것이다. 뿌옇고 모호한 다리를 바라보는 화폭, 과학발전을 의미하듯 먼 공장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나고 있다. 두 사람은 강가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돛단배들의 돛들은 굴뚝, 나무, 사람들과 함께 수직선을 형성하며 다리나 배의 형상이 보여주는 수평선들과 직각으로 만나고 있다. 망점을 통해서 형성된 중간 색들은 뿌옇지만 색채원근을 보여주고 있다. 형태를 형성하는 선들의 자리를 점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전통적 사실 묘사와는 다른 방법으로 인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순간의 인상은 인상파들의 그것보다 보다 해체적이고 실험적이며 인위적이다.
그가 색채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나 그의 그림이 과학적이라는 세간의 평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망점을 통해서 분할된 색들이 형성하는 색감을 추구한 그의 작업이 인상파의 순간포착을 뛰어넘는 본질추구의 한가지 전형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작업이 과학에서 섭취한 것은 하나의 동기일 뿐, 표현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과학은 예술에 영향을 주지만 그 영향은 예술적 방법이 아니면 표현되기 힘든 것이다. 쇠라의 과학적 탐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거가 되어줬다는 의미에서 대단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신의 예술인 자연을 모방하던 서양예술에 비자연적인 모습을 하나 얹어주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두 가지 예술의 방법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과 ‘비자연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자에 수백 년 탐닉하던 서양미술이 후자의 의미와 중요성을 혹독하게 깨달은 것은 팔십프로 ‘인상파’라는 외개인들 때문이다. 인상파를 통해 자연의 모방이 주는 결핍과 원형에 대한 인간들의 지독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기인상파라는 구원투수들은 그 지독한 사랑을 몸소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전부 투신한 선구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애석하고 안타까운 자가 바로 쇠라다. 그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어떤 변용을 보여주었을지, 그가 과학에서 훔쳐온 차가운 표현법들이 어떤 경로로 현대미술을 성형하였을지 무척 궁금하기 때문이다.
쇠라의 이 서늘한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숨겨놓은 수많은 망점들 만큼 다양했던 내 인생의 망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것 같다. 안경을 벗고 어느 강변에 서있었던 그 어느 날 나의 시간이 떠오른다. 그것은 아련하고 뿌옇지만, 오직 예술만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차가운 시간여행의 기차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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