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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어쩔 수 없음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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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 이상의 장르가 섞인 음악을 ‘크로스오버(Crossover)’ 혹은 ‘퓨전(Fusion)’이라고 부른다. 기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음악은 크로스오버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 어느 장르도 독자적인 자신만의 목청으로 소리 지르기에, 세상은 미안할 정도로 복잡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에 일찌감치 크로스오버의 빛나는 업적을 이룬 인물이 스페인 르네상스의 거장 엘 그레코(1541~1614)다.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의 대표적 화가이고, ‘포스트비잔틴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으며, 이태리로 가서 티치아노와 틴토레토에게 그림을 배웠고, 스페인에서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런 이력은 그의 크로스오버적 성향을 짐작하게 한다. 크레타 섬에서 사실적 묘사에 초연한 비잔틴 미술의 영감을 부여 받았을 것이고,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의 퇴로를 지켜 보며 티치아노의 색감과 틴토레토의 정형에서의 탈피를 보았을 것이고, 스페인에서 그러한 자신의 크로스오버적 화풍을 펼치며 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르네상스 미술의 갈래인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아 인위적이고, 부조화 속의 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기독교미술의 승리인 비잔틴 미술과 섞여 대단히 이례적이고 매혹적이었다. 주의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사용되는 ‘매너리즘’이라는 일반적 용어로 미술사의 ‘매너리즘’을 정의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관습과 정형의 미를 거부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은 현대미술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엘 그레코는 현대미술가들이 가장 매력을 느끼며 연구하는 옛 화가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길쭉한 인체와 엉뚱한 원근법 등을 도입하고, 기존 미의 정형에 무언가를 덧칠하고 싶었던 매너리즘의 극적 표현이 가장 아름답게 자리잡은 곳이 바로 엘 그레코라는 화가의 그림이었다.  

 

그가 여러 작품으로 남긴 주제를 그리고 있는 그림이다(1600년 경, 내셔널갤러리).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성전 정화’ 장면이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내쫓고 상을 엎었다는 일화다. 어색하지만 강렬하게 주름진 옷을 입고 그리스도는 중심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난감한 자세의 왼편 인물들은 상인들, 즉 회개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을 상징하듯 왼편의 벽화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보다 정적인 오른편의 인물들은 제자들, 즉 회개한 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을 상징하듯 오른편의 벽화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뒤편에는 아치형 출구 사이로 예루살렘의 건물들과 하늘이 보인다. 오른편 아래에서 턱에 팔을 괴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소곳이 지켜보는 늙은 제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너무도 긴 다리, 일어선다면 아마도 최홍만 수준의 거인일 것으로 보인다. 이 비정상적 비례야말로 매너리즘의 생생한 반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의 엘 그레코는, 혹은 당시의 교회에서는 예수의 이런 폭력적인 일화를 대단히 신비하게 보았던 것 같다. 스스로 종의 자세를 가르치려 손수 제자들 발을 씻겼던 사랑의 그리스도지만,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상인들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채찍을 휘둘렀던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예수의 ‘어쩔 수 없음’이라고 부른다. 더 없는 사랑을 보여준 사랑의 그리스도지만, 성전을 더럽힌 상인들에게 부드러운 가르침 대신 채찍을 휘두를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날의 교회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그 점이다. 분노는 때로 가슴 깊은 곳의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드럽고 우아한 용서란, 사실 얼마나 쉬운 것인가. 우리는 부드럽고 우아하게 말하는 사람을 흔히 착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불의를 보고도 상냥하다면 그것은 착함을 지나친 것이다. 독재정권을 향해 그저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기만 했던 우리의 교회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운 것은 그 때문이다.

 

리 사회도 그런 착각에 능하다. 학벌 속인 연예인들을 용서해준 것을 우리 사회가 착해서라고 보지 않는다. 뭘 모르기 때문이다. 그 뻔뻔한 인간들을 용서해준 우리 사회의 부드러움 앞에 얼마나 걱정스러운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다시 학벌 속인 연예인들이 등장하면 또 봐줘야 할까, 계속 봐줘야 할까.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은 무얼 보고 자라야 할까. 학벌 속인 것쯤은 별 것 아니구나, 라는 집단무의식 속에서 커나가야 할까. 이루지 못한 일제청산을 추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사회정의를 쌓는 작은 돌덩이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보다 중요한 바로 오늘 우리의 책임이다.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을 철저히 구별하는 사회가 영국이다. 우리가 영국사회에서 배워야 할 것은 사회정의의 ‘어쩔 수 없음’이다. 비방하는 정치가, 헐뜯는 종교인들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어쩔 수 없음’과 너무도 거리가 먼 근무태만으로 보인다. 엘 그레코가 그린 그리스도의 폭력은 결코 과시와 허세를 향한 폭력이 아니다. 사랑의 변주곡이다. 진정한 사랑의 채찍이다. ‘어쩔 수 없음’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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