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나르시스의 변형 / 달리

hherald 2010.07.17 19:34 조회 수 : 5481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31
나르시스의 변형/ 달리
Metamorphosis of Narcissus/ Salvador Dali


 
31그림.jpg

 

 

꿈 속에서 부유하는 좌표


우리는 꿈꾼다. 꿈꾸기 위하여 먼 길을 단숨에 달리기도 하고, 꿈꾸기 위하여 몽롱한 상태로 탬버린을 흔들며 춤추기도 한다. 꿈꾸기 위하여 보다 그럴 듯 하게 사랑하려고 하고, 꿈꾸기 위하여 돈방석에 앉아 보려고도 한다. 인간은 꿈꾸기 위하여 나이를 먹는 동물이다. 세월이라는 시간의 현상도 꿈을 경험화하려는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좀처럼 꿈은 인간의 경험이 되지 못한다. 떡국 먹은 횟수가 꿈의 경험과 직결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이를 먹었다고 더 현명해지는 시간의 공식이란 없다. 꿈은 어쩌면 과거에 집착하는 편집증 환자다. 경험과 기억이 없는 꿈이라는 것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 오묘한 꿈의 변성과 싸운 위대한 과학자이자 정신병자, 아니 정신분석학자가 프로이드(1856~1939) 박사다. 그의 꿈과의 싸움의 기록은 이십 세기 예술에 수려한 날개 하나를 달아 준다. 그 날개의 이름은 ‘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맹장이다. 초현실을 운행하는 현대 예술의 꿈은 그렇게 비틀거리기 시작하였다.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스페인 남자 살바도르 달리(1904~89)의 화려한 소품 ‘나르시스의 변형(1937)’은 테이트모던의 빛나는 걸작 한 점이다. 달리는 그 기괴한 성품과 철부지 행동과 예술가다운 오만으로 점철된 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파행으로 몰고 갔다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전형과 가장 부합되는 인물의 하나다. 그럼에도 잘 먹고 잘 살다가 갔다는 측면에서 양심불량자다. 자신을 천재라고 지나치게 인정했으며 자신의 난잡한 꿈을 화폭에 담아내고 심하게 걸작이라고 뽐냈다. 그는 소심증과 대범함 사이를 가파르게 오르락 거린 이십 세기 미술의 정신 나간 마법사다. 그리고 전쟁으로 얼룩진 유럽의 격동과 조국 스페인의 슬픔의 내성으로 인하여, 인간의 무의식을 폭넓게 휘둘렀던 카이저 수염의 난폭자였다. 그의 심각한 착시현상이 우리에게 공감되는 것은 그의 세대가 겪어낸 몇 차례의 끔직한 전쟁 때문이다.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인간들의 의식을 대체할 영역은 프로이드박사가 보여준 인류의 새로운 경험, 무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신화의 자뻑맨(자신에게 뻑간 사람) 나르시스의 우화는 집요한 화가 달리를 만나면서 산산히 분해된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못이겨 자살한 미소년 나르시스를 테마로 한 이 그림은, 무작정 화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야 하는 감상자의 피곤함을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는, 일명 ‘건방진 그림’의 대명사다. 왼쪽의 무릎에 머리를 쳐박은 괴상한 인물은 나르시스로 보인다. 현실이다. 입증하듯 물에는 정상적인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은 왠지 우리에게 꿈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오른쪽 비슷한 형상은 계란을 쥐고 있는 손이다. 계란에서는 머리칼 대신 꽃이 피어나고 있다. 아래에는 그림자 대신 손모양이 이어지고 있다. 계란은 꽃의 뿌리에 의해 깨지고 있는 듯 보인다. 땅을 바라보고 있다. 꿈이다. 입증하듯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꿈은 왠지 우리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두 형상 사이의 원경에는 마치 엘그레코의 인물들 같은 길쭉하고 벌거벗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웅성거리고 있다. 군중들이다. 추종자들이다. 구경꾼들이다. 관광객들이다. 유권자들이다. 오른쪽 산골짝에는 벌거벗은 인물상이 부끄러운 듯 뒷모습을 비틀고 있다. 체스판 같은 바닥 위에 올려져 있다. 우상이다. 나르시스다. 후보자다. 신화다. 환상이다. 아래쪽에는 인간 세상에 아무 관심 없어 보이는 동물이 한 마리 일용할 양식을 단단히 물고 있다.

 

나의 인내는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더 이상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 엄청난 그림을 쳐다보기 힘들다. 슬플 만큼 슬펐으므로 이제 나의 오감은 일몰과 더불어 퇴근해야 하는 직장인처럼 심히 피곤하다. 이쯤에서 나는 과연 출근이 꿈인지 퇴근이 꿈인지 아리송해지는 직장인처럼 허탈감에 휩싸인다. 달리의 그림은 일종의 헬리콥터다. 감상자를 꼭 이런 협곡에 떨어뜨리고 사라진다. 꿈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무엇을 생각해보는 것은 그래서 아주 아주 잔인한 작업이다. 초현실이란 현실 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불법체류자를 부르는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는 그저 자신에게 할당된 작지만 거룩한 투표권을 행사할 뿐이다.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란 화가의 통제하에 관리 되는 일목요연한 것만은 아니다. 화가의 경험이 우리에게 이입되는 과정이 그렇게 획일적이거나 단순하거나 안성맞춤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때로는 그것은 충격이 될 수도 있고 불쾌한 경험이 될 수도 있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이미 우리 인류의 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드박사의 ‘꿈의 해석’이 그랬던 것처럼, 아인슈타인의 공식이 그랬던 것처럼, 챨스 다윈의 ‘진화론’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과거지향의 꿈일 뿐이다. 그 꿈 속에서 부유하는 우리는, 이름없는 좌표일 뿐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39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2 빨강 노랑 파랑의 조화/ 몬드리안 [276] file hherald 2010.11.15
38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1 [299] file hherald 2010.11.08
37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0 [226] file hherald 2010.11.03
36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7 쿡햄의 부활/ 스탠리 스펜서 [292] file hherald 2010.10.11
35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6 페르난도 서커스단의 라라/ 에드가 드가 [278] hherald 2010.09.27
34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4 앤드루스 부부/ 게인즈버러 [348] file hherald 2010.09.20
33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3 샬롯의 여인/ 워터하우스 [328] file hherald 2010.09.13
32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2 현대의 우상/ 움베르토 보치오니 [524] file hherald 2010.09.13
31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1 하얀 개와 여인/ 루시안 프로이드 [1884] file hherald 2010.09.06
30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0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 [552] file hherald 2010.08.23
29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39 잠자는 농부/ 아드리안 브라우어 [244] hherald 2010.08.09
28 대사들/ 한스 홀바인 [613] file hherald 2010.08.02
27 쿠르브부아의 다리/ 조르주 쇠라 [268] file hherald 2010.07.26
26 열대 폭풍우 속의 호랑이(놀라움!)/ 앙리 루소 [296] file hherald 2010.07.19
25 발코니 / 피터 블레이크 [217] file hherald 2010.07.17
24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는 그리스도 / 엘 그레코 [675] file hherald 2010.07.17
23 숲과 비둘기 / 에른스트 [565] file hherald 2010.07.17
22 무아트시에 부인 / 앵그르 [228] file hherald 2010.07.17
» 나르시스의 변형 / 달리 [448] file hherald 2010.07.17
20 세례받는 그리스도 /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82] file hherald 2010.07.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