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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41
하얀 개와 여인/ 루시안 프로이드
Girl with a White Dog/ Lucian Freud
  

고요한 실존의 무료한 연못

 

화가가 바라보는 대상은 오브제이자 화가 자신이다. 미술은 대상의 놀이가 아니라 화가의 놀이다. 화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놀이에 우리가 동참하고자 하는 것은, 필경 우리 모두가 놀이를 필요로 하는 무료한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무료함은 대체로 존재에 대한 막막한 절망감에서 오는 것 같다. 까뮈의 걸작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라는 평범한 세일즈맨처럼, 우리 모두는 햇빛 때문에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 지극히 위험한 생을 살고 있다. 이 위험한 부조리의 사회 속에서 화가들은 대상을 바라보며 표현하는 놀이를 통해 실존의 냄새를 연기처럼 피워 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미술관에 모여 화가들이 피워낸 그 냄새를 맡으며 무료함을 차분히 희석시키고자 한다. 각박한 삶의 계산이나 옹졸한 이해타산에서 잠깐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누군가에게서 정성껏 선물 받은 따스하고 흐뭇한 햇빛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그림.jpg 무료한 당신을 고요한 실존의 연못가로 안내하는 화가가 생존하는 영국의 대가 루시안 프로이드(1922~)다. 그는 그림 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화가다. 1995년 그가 영국의 평범한 뚱녀 수 틸리라는 여성에게 단돈 20파운드의 모델료를 지불하고 그린 누드화는 몇 년 전 무려 3360만 달러에 팔려, 생존작가 그림 값의 최고기록을 경신한바 있다. (33,600,000달러!, 이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 게 바로 현대다. 이런걸 나는 ‘빌어먹을 모던’이라고 부르며 산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드 박사의 친손자이며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나치의 탄압을 피해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함께 이십 세기 영국미술의 주역인 그는 베이컨처럼 심하게 형태를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자신의 시각으로 현대를 화폭에 담아낸 화가로 유명하다. 인간 육체를 아무런 미화 없이 서늘하게 표현하기를 즐긴 그의 인물들은 그래서 늘 외롭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는 집요한 사실묘사에 놀라운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 ‘실존하는 앵그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그는 족히 40명 이상의 자식을 낳았을 거라는 추측을 세상에 퍼뜨릴 만큼 많은 여성과 합방하였다. 그의 초상화들은 두꺼운 그의 물감처럼 가라 앉은 색감과 짙은 농도를 지니고 있어서 현대의 부조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데 아주 적절하였다고 본다.

 

 

그의 첫 번째 아내였던 키티라는 여성을 그려냈다. (1951~1952, 테이트 브리튼) 임신중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다. 낮은 채도를 유지하는 화면 속에는 키티와 이름 모를 하얀 개 한 마리, 그리고 매트리스, 커튼, 하얀 문, 약간의 바닥이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편한 자세로 매트리스에 앉아 있다. 그녀는 한쪽 유방을 드러낸 채 한 손으로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그녀의 골격과 윤곽은 편한 자세와는 달리 왠지 긴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녀는 두 눈을 양껏 치켜 뜬 채 화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다분히 겁에 질린 감정을 억제하려는 듯한 표정이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드러난 유방은 비키니자국으로 하얗다. 또 자세히 보면 큰 점이 하나 유방 위에 있다. 그녀의 풀어 헤쳐진 겨울용 나이트 가운은 고급으로 보인다. 왼쪽 소매를 더 많이 접어 입고 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은 가슴과 비교해볼 때 지난 여름 햇볕에 많이 그을린 듯 하다. 그녀의 다리에 주둥이를 편하게 올려 놓은 하얀 개는 키티와 비교된다. 표정은 애완동물의 숙명처럼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으나, 몸통은 키티 보다 한결 유연하고 부드럽다. 키티와 하얀 개의 몸무게만큼 주저 앉은 매트리스는 굵은 줄과 가는 줄이 반복되는 줄무늬다. 그 거친 질감이 느껴진다. 역시 칙칙하고 두터운 커튼은 가운데 부분에 굵은 주름들이 있어서 누군가 - 아마도 화가일 것이다. ? 방금 닫아 놓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누군가에 의해서 ? 아마도 화가일 것이다 ? 세상과 차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존 파울스의 ‘콜렉터’의 여주인공 미란다처럼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얀 방문은 키티와 개가 언제든지 나가버릴 수 있음을 상징하듯 악착같이 일부를 드러내고 있다. (손잡이가 보이지 않으므로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지의 여부는 유감스럽게도 확인 불가능이다.) 우측 하단에 약간의 바닥이 보인다. 카펫으로 추정되는 그 약간의 바닥은 아주 반가운 존재다. 키티와 하얀 개는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지한 채 살고 있는 생명체란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반갑다. 고요한 실존의 연못에 나와 비슷한 존재가 살고 있다니! 반갑다.

 

우리가 그림을 보는 것은 존재의 막막함에서 오는 무료함을 이겨내기 위한 서글픈 투쟁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 가장 무료한 인간들인 화가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 스스로 항체를 만들어내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대망상에 이르기 전에 우리의 무료함을 접어 종이배를 만들어 실존의 연못에 띄워 보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깨어나야 할 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무료한 연못에 한 여인과 하얀 개 한 마리를 심하게 단단히 가둬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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