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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2
위트레흐트의 부르케르크/ 산레담
The Interior of the Buurkerk at Utrecht/ Pieter Saenredam


 그림.JPG



낙서의 커다란 꿈 

서양역사를 그리스도교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특히 미개했던 게르만족의 정신적 수준을 향상시켜주면서 유럽 전체의 사상적 안정을 도모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탁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금 현대 교회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그러한 그리스도 사상의 역사의 씨줄 위에 현대문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빠르게 물신화의 시대로 잠입한 인류를 이끌어야 할 정신적 역할을 중세의 교회에서 찾으려는 움직임들이 활발하다. 그 움직임들은 오늘날의 교회가 중세의 교회들처럼 보다 강력한 영적인 리더십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필자도 교회가 교회답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하나지만, 그러나 어떤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인지를 알지는 못한다. 교회란 한 개인의 기대감이나 바램으로 성장하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꿈을 지닌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며 발전한 것이 유럽이다. 따라서 유럽 문화의 전반에 가장 커다란 사상적 감흥을 준 것도 역시 교회다. 한국 교회의 리더들이 보다 진지하게 유럽 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주기를 바란다. 세계적이라는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문화에는, 그들의 시각으로라면 한없이 미개했을 한반도에서 열정적으로 선교했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에게는 어느 교회 못지않게 교회 같은 감동을 주는 산책로가 영국의 국립미술관 내셔널갤러리다. 그 길고 긴 산책로에서 서양문화를 어떻게 그리스도 사상이 이끌어주었는지를 눈치채며 걸어 보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산책의 일종이다. 내셔널갤러리의 돋보이는 교회 그림을 소개하는 게 오늘의 산책이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 산레담(1597~1665)의 ‘위트헤흐트의 부르케르크(1644)’다. 위트헤흐트의 교회 부르케르크의 내부를 그린 그림이다. (필자는 그냥 ‘낙서’라고 부르고 싶은 그림이다.) 
하를렘에서 역사화가와 종교화가로 활동했던 산레담은 교회내부를 그려내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 도면에서 영향을 받은 그의 사실적인 그림들은 종교화등을 금기시했던 신교 교회의 하얀 회벽들과 기둥, 장식을 하지 않은 맨 유리창 등을 장중한 분위기로 표현해내었다. 건축적인 시각으로 정확히 교회의 세부를 그려낸 거의 최초의 화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산레담의 대표작은 부르케르크 교회의 내부를 그린 두 점의 그림이다. 한 점은 미국 텍사스에 있으며 다른 한 점이 바로 이 그림이다. 미국에 있는 그림은 1636년에 그린 것이고, 이 그림의 연대는 1644년으로 되어 있다. 두 그림 사이의 8년이라는 터울은, 전해져 내려오는 산레담의 습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산레담은 조수와 함께 교회의 스케치를 한 후 스튜디오에 돌아와 그림을 완성시키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런던 버전은 스케치 이후 무려 8년 후에 완성된 그림이다. 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산레담이 기어코 이 그림을 완성시킨 이유는 뭘까?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건축가의 시점처럼 보이는 교회 내부의 모습이다. 높은 천정까지 닿고 있는 그림은 통일감 있는 신교 교회의 내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벽화나 화려한 장식들이 배제된 채 필수적인 십계명이나 몇 개의 문장만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고 있는 빛은 교회 내부를 고요한 꿈 속에 내려놓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견고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짙은 바닥재는 그 고요한 꿈을 올려 놓기에 충분해 보인다. 몇몇 사람들은 교회의 크기를 보여주려는 듯 곳곳에서 친절한 자세로 서 있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 생기와 재미를 불러 넣고 있는 것은 오른쪽에 있는 두 소년이다. 그들의 모습은 이 그림이 보여주는 교회라는 곳의 의미에 다양성의 묘미를 심어주고 있다.
한 소년은 강아지와 놀고 있다. 아마도 강아지에게 뒷발로 서는 훈련을 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조련사의 그것 같은 소년의 동작, 그리고 소년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듯한 강아지의 모습이 재미있다. 교회가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곳이라는 통념을 암묵리에 보여주고 있다.
거의 이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보여지는 다른 소년은 벽에 낙서를 하고 있는 중이다. 소년은 자신의 몸을 늘릴 수 있었다는 전설 속의 말(Bayard)을 그리고 있다. 늘어난 말의 등에 네 명의 기사들이 타고 있다. 이 말썽꾸러기 소년의 낙서 밑에 화가는 자신의 서명을 하였다.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는 마술의 말 이야기를 엄숙한 교회 벽에 끄적거리고 있는 소년의 낙서 밑에, 마치 이 모든 광경은 산레담이라는 화가의 책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표시처럼 서명하였다. 교회가 모든 무지나 불만까지를 끌어안고 존재해야 하는 곳임을 암묵리에 보여주고 있다.
산레담은 그의 대부분의 교회그림처럼 교회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이상한 효과를 통해 교회의 보이지 않는 모습까지를 잡고 있다. 장난하고 있는 두 소년의 모습을 통해 창에 비치는 하늘빛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리석고 유치한 믿음이 교회 안에서 보다 커다랗고 숭고한 꿈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을 믿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그림을 기어코 완성시킨 것은 그러한 화가의 믿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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