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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65
헤롯왕의 유아학살/브뢰헬
Massacre of the Innocents/ Pieter Bruegel the Elder  

 


멀리서 바라본 비극

 


십 년도 넘은 일이지만 생생히 기억난다. 갓 초등학생이던 딸아이가 내게 정색으로 물어 왔다. “아빠, 브로이겔이라는 화가 알아?” 내심 딸아이의 미술적 천재성을 의심하던 나에게 돌아온 질문의 배경은, 미술시간에 일년 동안 공부할 화가라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게 일년 동안 한 화가, 그것도 브뢰헬을 공부시킨다?’ 충격이었다. 영국 학교들의 빛나는 깊이 교육에 존경심이 솟아났다. 나의 어린 시절 미술수업은 그저 드넓은 바다 위에서 허우적거리던 넓이 교육이었을 뿐.
비슷한 시기, 런던 지하철 북부선(Northern Line)의 어느 자리에 누군가 버리고 간 영국 신문에서 나는 우아한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이 세상 그림 중에 당신이 한 점을 선택해서 가질 수 있다면, 갖고 싶은 그림은?’ 가장 많은 영국의 문화계 인사들이 선택한 그림은 브뢰헬의 ‘눈 속의 사냥꾼’이었다.
브뢰헬(1525? ~1569)은 다빈치나 세잔 혹은 피카소처럼 이 짧은 지면으로 엮어내기에는 너무도 방대한 생각의 종횡(縱橫)을 인류 미술사에 안긴 뚜렷한 거장이었다. 그는 종교혁명으로 새롭게 부각된 풍속화의 달인이었으며, 농민들의 삶을 신랄하게 보여준 진정한 도시 화가였으며, 그림이 알레고리라는 무기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민중 미술의 아버지였다. 마치 미술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치스러운 공사(空事)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화가다. 혹여 그의 그림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다면, 그 이상의 값진 경험이 어디 흔하겠는가? 돈의 노예요, 명예의 걸식이며, 사회적으로는 약아빠진 회색인(灰色人)이며, 정치적으로는 몽매한 기회주의자이며, 종교적으로는 사뿐한 이기주의자들인 우리의 자화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가 어디 흔한가 말이다.
브뢰헬의 그림 중 돋보이는 런던의 한 점은 ‘헤롯왕의 유아학살(1565~7)’이다. 영국 왕실의 소장품(Royal Collection)중의 한 점으로 버킹검 궁전이나 윈저성, 햄튼코트 등으로 옮겨 다니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윈저성에 걸릴 때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다.
유대왕 헤롯의 유아학살을 그리고 있다. 로마에 의해 유대의 왕이 된 헤롯은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 때문에 예수의 탄생을 알게 되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들에 의해 아기 예수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되고, 헤롯은 베들레헴 일대의 두 살 이하 사내 아이를 모두 죽여버리라고 명한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성경의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중의 하나다.
제목을 보지 않고 이 그림을 본다면, 그 끔찍한 역사의 비린내를 맡기란 쉽지 않다. 그저 어수선하고 혼잡한 눈 덮인 어느 시골 마을의 정겨운 풍경이라고 보기 쉽다. 같은 주제를 그린 루벤스의 그림과 비교된다. 겨울 나무들이 춥지 않게 느껴지도록 눈 덮인 마을, 차가운 하늘을 나는 겨울 새들, 무언가를 주고 받는듯한 마을 사람들, 얼어붙은 웅덩이에 자빠진 커다란 항아리……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복잡한 인간군상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아주 자세히 바라보기 전까지 비극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월리를 찾아라’를 기억할 것이다. 1987년 처음 출간되어 전세계를 사로잡았던 복잡한 그림책. 털모자에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주인공 월리를 찾기 위하여 복잡하고 위트 넘치는 그림 속을 헤매게 하던 그 재미있는 그림책. 영국의 마틴핸드포드가 유행시킨 그런 복잡한 인간군상의 그림책들을 ‘비멜빌데르부크(WimmelBilderBuch)’라고 부른다. 독일어인데 영어로 Teeming Picture book이라는 뜻이니 우리말로 한다면 ‘꽉차고 넘치는 그림책’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 그림의 조상으로 꼽히는 화가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더불어 브뢰헬이다. 기괴함과 복잡함은 보스에서 시작되어 브뢰헬에게서 발전되었다. 
이 그림은 많은 브뢰헬의 그림이 그런 것처럼 당시 화가의 조국이었던 플랑드르를 침략하였던 스페인의 만행을 은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 화두에 대한 화가의 비교 대상은 성경의 가장 잔인한 이야기다. 스페인의 군사적 종교적 짓밟음을, 눈처럼 순수한 아기들을 학살한 헤롯왕의 잔인한 행동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내 아기들을 찾으려는 군인들과 숨기려는 주민들의 풍경이다. 자세히 바라보면 마을 주민들의 표정들은 공포와 경악으로 이미 굳어 있다. 군인들은 아기들 대신 보따리나 항아리, 거위 등을 약탈해 가고 있다. 군인들이 모두 찾아내어 죽여버려야 하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꼭꼭 숨어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으렴!”)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아마도 영국 땅에서 자행되었을 역사의 비극적 모습이어서, 이 그림을 영국왕실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꽤 재미있는 사실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비극은 흔히 우리에게 근경(近景)으로만 다가오는 경향이 있다. 슬픔은 클로즈업되기만 하는 경향이 있다. 비극의 원경(遠景)을 바라 볼 때 우리가 좀더 성숙해질 수 있음을 깨우쳐주고 있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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