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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64
남자의 초상(양복장이)/모로니
Portrait of a Man (The Tailor)/ Giovanni Battista Moroni

 

그림.JPG
시간을 자른 재단사

 

어떤 그림은 시대를 초월한 빛이 나기도 한다. 도저히 그림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만큼 젊어 보이거나, 시대의 바람을 피해 간듯한 초월의 빛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그림들은 그림의 진위를 의심하게 될 만큼 생생하거나,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여부를 의심하게 될 만큼 당혹의 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그림들이 주는 희열은 시간에 대한 인간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의젓하다. 인간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시간이라는 괴물에 대한 반항이 미술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희열이 그것이다. 미술 속에만 숨어 있는 놀라운 희열이다.
시간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 그런 그림을 보는 것은 그래서 타당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시도 쉬지 않고 있다는 자각은 외로움이라는 불치의 병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그림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시간이 있으므로 오히려 ‘외롭지 않다’는 묘한 깨달음 같은 것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미술이 우리 인생에 작용하는 수많은 영향력 중에는 그런 오묘한 아름다움도 있는 것이다.
초상화라는 장르는 그런 아름다움을 듬뿍 담은 그림들이다.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려는 배짱은 고대 이집트부터 시작되었다. 로마의 납화법으로 그려진 대영박물관의 이집트 미이라의 초상화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멈춰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길 때, 시간은 잠시 멈추어줄지도 모른다. 인간의 멈춰선 모습을 구경하기 위하여 시간도 가던 길을 잠시 멈출지도 정말 모른다. 
런던에 존재하는 수많은 초상화 중에서 유독 시간이 멈춰 서서 구경하는 듯한 그림으로 나는 이 그림을 지목하고 싶다. 후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화가로 거의 티치아노급의 명성을 초상화로 누렸다는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1520/4~1578)의 어느 남자의 초상, 일명 ‘양복장이(1570, 내셔널갤러리)’다. 모로니 초상화의 특징인 차분함 속에 살아있는 자연스러움이 단연 돋보이는 그림이다.
어느 평범한 양복장이를 평범하게 표현한 이 그림이 비범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살펴보면 모든 것이 차분하고 평범하게 표현된 그림이지만 강렬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마력의 그림이다. 이 그림의 실물을 보고 있으면 시간을 초월한 양복장이가 바로 코 앞에 서 있는듯한 황홀한 착각에서 빠져 나오기 쉽지 않다. 차분함, 냉철함, 그리고 자연스러움……
그 자연스러움의 모든 것은 젊은 양복장이의 선명한 오른쪽 눈에서 오고 있다. 아마도 가위로 양복지를 재단하고 있다가 약간 고개를 올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순간인 것 같다. 그는 평범한 양복장이의 모습으로, 그러나 너무도 비범하게 서있다. 오른쪽 눈은 마치 화폭의 가장 강력한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런 오른쪽 눈의 강력한 힘은 그림의 모든 세부가 추구하는 하나의 믿음처럼 독보적으로 빛나고 있다.
그 힘은 먼저 회색 배경과 차별되게 비치는 일말의 이상한 조명에서 오고 있다. 그리고 그림의 중심선처럼 위치한 상의의 가운데 옷자락과 야릇한 각도로 만나고 있는 눈의 위치에서 오고 있다. 그리고 가운데 옷자락을 중심으로 펼쳐진 짙은 명암 대비에서 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자세하게 표현하려 하지 않은듯한, 그러면서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충분히 느끼게 해주는 상의의 질감에서 오고 있다. 그리고 마치 오른쪽 눈을 받치기 위한 삼각대처럼 벌어진 두 팔에서 오고 있다. 가위를 쥔 힘이 들어간 오른손과 그보다 약하게 힘이 들어간 검은 양복지를 쥐고 있는 왼 손에서 오고 있다.
양복장이의 오른쪽 눈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상한 거리상의 착시를 경험하게 된다. 분명 우리의 코 앞에 서 있는듯한데 그 거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양복장이의 너무도 진지한 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복장이 앞에 놓인 탁자가 주는 대단한 효과이기도 하다. 탁자의 위치와 각도가 너무도 생생하여 우리는 양복장이와 우리 사이에 놓인 시간 차이를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것이다.
대략 이런 이유들로 나는 이 양복장이의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아니 이 그림을 훔쳐보는 나의 시간마저도 가늠할 수 없다. 모로니의 시대인 1500년대와 나의 시대인 2000년대 사이의 간극이 사라져버렸다. 한가한 현대인처럼 내셔널갤러리에 멈춰선 나의 시간과 재단을 하다가 문득 멈춰선 양복장이의 시간 사이의 틈새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평생 양복을 만들다가 사라졌을 오백 년 전 어느 양복장이의 시간이 나에게 전이된 것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참 큰 일이다. 그렇지, 참으로 큰 일이다. 비록 오랫동안 런던에 유배 중인 나의 시시한 시간이지만 누군가 가위질해버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우리를 우리답게 해주기 위하여 흘러가고 있다. 시간을 붓으로 가위질한 옛 화가들의 치열한 업보가 어쩔 땐 무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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