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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9
Special Edition


 

윌리엄 모리스를 생각하며


미술이 우리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마다 비관적이 된다. 미술은 그 지대한 사명감으로 오늘도 우리 사회를 칠하고 부수고 깎아 내고 다듬고 변형시키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이 미술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쉽사리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새 옷을 고르며, 새 가구들을 고르며 우리는 그것이 아름다운 미술행위라는 것을 망각하며 살고 있다. 미술이 그 정신을 사회에 빼앗겨버렸기 때문이다. 미술의 정신을 사회가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미술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미술 스스로가 사회에 흡수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방대한 인류 역사의 질곡에게 그 일부의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종교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이다. 혁명 이후 신교 국가가 된 북유럽 미술의 중심 네덜란드는 흔하디 흔하던 종교화가 금기시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화가들의 생활을 위하여 풍속화 같은 새로운 장르가 활성화된다. 말하자면 사회가 미술의 새로운 진로를 강요한 셈이다. 미술은 사회의 진행방향을 따라 스스로 변신하고 또 변신하며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되어야 했던 것이 어쩌면 비극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우리에게 늘 따라다니던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미술이냐?”는 태도는 회상컨대 어리석은 무지였다. 미술이 사는 것과 무관하다는 발상, 미술이 흡사 음풍농월처럼 치부되어온 우리의 사회 분위기는 마치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슬픈 일이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토인들에게 존재하는 사랑스러운 미술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중세의 순수했던 미술에 대한 열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미술을 접하며 망각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그림을 본다는 행위에 대한 왜곡된 편견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 또한 미술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곧잘 간과한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곰브리치박사의 통찰은 의미심장한 화두의 시작일 뿐이다. 이 사회의 어떤 선생도 ‘돈도 잘 벌고’ 라는 후렴구를 빼놓고는 세상에 대한 강의를 할 수 없는 물신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단 하나 남아 있는 순수함인 예술 마저 망각하고 산다면 얼마나 절망적인 모습인가. 왜 이 시대에는 화려한 연예인들만이 예술가 대접을 받고 있는지. 돈이라는 것은 만날 수도 있고 못 만날 수도 있는 이 세상의 뜬구름이라고 가르쳐 주는 지도자는 왜 드문 것인지. 비겁한 부와 정의로운 가난의 비교를 왜 우리 사회는 기피하고만 있는지. 몇 백 억 하는 자신의 촌스러운 그림을 보며 고호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녕 미술마저 괴물처럼 변해버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답답한 생각이 소용돌이칠 때 마다 생각나는 사람은 영국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미술가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96)다. 모리스는 ‘라파엘전파’의 화가였지만, 화가로서보다는 공예가, 디자이너, 정치가, 문필가, 사회주의자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기이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퍽 흥미롭고, 그가 만들었던 회사에서 생산된 가구나 벽지 등도 재미있지만, 내가 답답할 때마다 그를 떠올리는 것은 중세주의자였던 그가 사회와 미술에 품었던 사랑의 시각, 나아가서 미술이 사회와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그의 유토피아에 대한 짝사랑 때문이다. 모리스는 인간의 노동이란 자유의지가 전제된 창조행위가 될 때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예술을 통해 노동의 즐거움이 발현되는 사회를 꿈꾸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인간을 노동력으로 분석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이다. 그것은 물론 그가 미술가였기에 가능한 생각이었으며, 오늘날처럼 험악한 세상에서 바라보기에 아주 매력적인 사회 설계도의 하나이다. 비인간성이 만연되어가는 자본주의 사회를 진정한 예술만이 구원할 수 있음을 내다본 모리스였다. 노동의 예술화, 예술의 생활화라는 인류가 감히 실현하지 못했던 (제도권 밖의 어느 미개한 부족들이 이 순간 지구 어디에선가 실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과제를 통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예술의 창조 행위를 공유하는 민중예술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랑스런 영국인이 윌리엄 모리스다.

 

삶을 예술로 승화시킬 때 인간이 진정으로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었던 모리스가 남긴 생활예술주의의 작품들은 런던의 ‘빅토리아알버트박물관’에서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한 사람이라면 모리스가 아내 버든(라파엘전파의 모델이었던)과의 신혼집으로 설계하여 건축한 ‘레드하우스(Red House)’를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레드하우스의 소박함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잘못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별천지와도 같다. 그 별천지의 까페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만지작거리며 인류의 미술에 대해, 혹은 우리 모두의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은, 런던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이다. 식어가는 커피와 함께 세상의 화려함이 안쓰러워지는 그 순간을, 나는, 진정 사랑 한다.   
        
글쓴이 최 동훈 그림.JPG 그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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