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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7
그림.jpg The Battle of San Romano/ Paolo Uccello

 

 


우화가 된 전쟁의 소실점


서양미술사는 하나의 단단한 역사다. 그 단단한 역사를 주도해 온 것은 새로운 사조를 추구한 화가들이나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들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감각에 의해 그림이라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인간들의 장난은 그 궤도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라파엘전파의 각성이 없었다면, 라파엘로 완성된 것이라고 믿었던 그림의 미는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상파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부그로(Bouguereau)같은 화가들의 사진 같은 그림들이 아직도 지상 최고의 그림으로 칭송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미술관을 각성하게 될 때 서양 미술은 과거의 그림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미술관이 탄생하면 물론 다시 바뀌어야 하였다. 중세 서양미술의 가장 중요한 신대륙 발견은 단연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관찰법이었다. 원근법이 넓혀준 미술가들의 지경은 이루말하기 힘들만큼 드넓은 것이지만, 냉정한 털보 세잔에 의해 원근법의 타당성이나 존재 가치가 뿌리 채 뽑혀버리고 말았다. 몇 백 년 잘 해먹은 원근법이라는 착시현상이 생존을 걱정할 만큼 위태로운 입지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런 서양미술사 속의 낙차 큰 변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 말하자면 ‘옛 화가’ 들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배들인 그들은 시류와 당대의 미술사조를 따라 하루 아침에 평가 절하되기도 하고, 하룻밤 사이에 영웅이나 천재가 되기도 한다.

 

원근법 발명 초창기에 가장 많은 열과 성을 원근법에 쏟았던 화가로 우리는 우첼로(1397~1475)를 기억한다. 우리에게 르네상스 당대 화가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준 ‘바사리전기’의 저자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는 우첼로를 원근법에 지나치게 경도된, 아니 거의 미친 화가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그림들은 전 세계 미술 교실에서 흔히 원근법의 충실한 습작들로 예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첼로라는 우리의 선배 화가를 한정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본다. 육백 년 전의 그의 그림이 분명 오늘날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믿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가 너무도 좋아하는 그림 한 점(옥스포드에 걸려 있는 ‘숲속의 사냥(1470)’, 다음에 꼭 한번 이야기하고 싶다.)을 남긴 우첼로의 대표작이 오늘의 그림 ‘산 로마노 전투(1438~40,내셔널갤러리)’다.

 

우첼로가 1432년 피렌체와 시에나간에 벌어진 일종의 국지전이었던 산로마노 전투를 그린 것은 메디치 가문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톨렌티노라는 피렌체의 전승 주역을 기념하기 위한 세폭화의 한 점이 바로 이 그림이다. (나머지 두 점은 이태리와 프랑스에 있다.) 백마를 탄 지휘자 톨렌티노를 중심으로 전투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피렌체군은 계곡에서 맞닥뜨린 적군과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투하고 있다. 우선 이 그림의 재미있는 감상의 출발점은 원근법적 공간에 인물들을 배치하기 위해 구사한 X형 구도에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미술 시간에 시험하였던 바로 그 X형 구도 말이다. 화폭을 X자로 나누어 길과 하늘로 공간을 양분하고, 양편에는 가로수들을 그려 넣었던 바로 그 그림처럼 이 그림은 전형적이다. 장미울타리와 오렌지 나무들을 중심으로 전투장면인 근경과 비현실적 원경이 나누어지고 있는데, 주인공 톨렌티노장군은 헬멧 대신 화려한 육각형의 모자를 쓰고 있다. 그의 헬멧은 그의 뒤에서 시종인 듯한 친구가 들고 서 있다. 장군답게 백마를 타고 있는데, 목마처럼 표현되어 왠지 어색한 그 매끈한 질감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말은 뛰어난 공간감각을 자랑한다. 그가 칼 대신 들고 있는 지휘봉 또한 어색하지만, 이상한 전쟁의 우화적 표현을 느끼게 해준다.

 

부러진 창들은 선원근법의 핵심인 소실점을 향해서 만나고 있는 자세로 떨어져 있다. 이 그림의 자연스러운 소설점 즉 X의 교차점은 장미 울타리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바닥에 쓰러진 갑옷은 자연스럽지 못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당시 화가들의 첨단 테크닉이었을 단축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메디치 가문의 화려한 명성처럼 실제의 금과 은으로 칠해진 것으로 알려진 여러 가지 장식들의 표현은 이미 많이 변색된 상태로 알려져 있다. 아이크 같은 네덜란드 화가들에 비해 분명히 덜 치열하게 묘사된 듯한 세부에도 불구하고 그 원근법적 공간감각으로 하여 원근법의 교과서 같은 그림으로 회자되는 명화다.

 

내가 이 그림에서 느끼는 매력은 조금 다른 곳에서 파생된다. 전쟁을 마치 하나의 게임처럼 묘사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메디치 가문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승리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이 그림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을 테니까. 그런 추정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뛰어넘는 일종의 상징성 같은 것이 보인다. 그것은, 현대적이다 아니다를 논하기 이전의 미술이라는 동질성의 문제에 보다 가까운 것이다.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전쟁, 마치 오늘날의 컴퓨터 게임 속에 등장할만한 전투장면이 거의 육백 년 전에 그려졌다는 놀라움이다. 고대 앗수르 미술처럼 전쟁을 하나의 사실로 묘사하고 있지만, 서사가 아니라 하나의 우화로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전쟁의 소실점이 엿보이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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