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만나는 런던-100
연재를 마치며/ A postscript
당신이 어찌 외롭다고 말할 수 있나요?
“문 닫힌 쓸쓸한 시장에서 다 떨어진 낡은 신발로 종이들을 차며 지나가는 늙은이를 본 적이 있나요? 자신감 잃은 그의 눈빛, 축 처진 그의 팔에는 어제의 이야기들이 담긴 어제의 신문이 들려 있죠. 당신이 어찌 외롭다고 말할 수 있나요? 어떻게 태양이 당신에게 비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나요? 저에게 당신 손을 잡고 런던의 거리들을 걷게 해주세요.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그런 모습들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런던 거리의 악사들이 즐겨 부르는 ‘Streets of London’에서 랄프맥텔은 이렇게 노래했다.
런던은 늙은 도시다. 어제의 그림들로 가득 찬 늙은 미술관들을 들락거리며 런던이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낡고 퇴색된 런던의 누더기 도로들은 올림픽을 앞두고 새 옷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그 모습을 볼수록 런던 사방의 퀴퀴한 냄새가 가여워지기 시작했다. 옛 것을 지킨다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다. 런던이 외롭고 힘들어 보였다. 물론 철없는 나의 여행은 재미있었다.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 긴 여행이 끝이 났다. 아쉬움 있다. 이야기 못한 그림들이 생각난다. 못다한 이야기들은 다음 여행의 신발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생각해 보면 시간 여행이었다. 런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옛 그림들을 찾아가 만나는 시간여행. 서양미술의 가장 중요한 오백 년을 얇은 지식과 폭 좁은 식견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고통이었지만, 나보다 더 힘들고 외로워 보이는 런던의 노숙자들을 볼 때 마다 섣부른 의욕을 다듬었다. 도대체 뭔 그런 난해무자비한 글을 쓰고 있느냐고 질책 받을 때마다, 나는 그저 감상자일 뿐이라는 정체성이 스스로 다독거렸다. 누구나 꼭꼭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미술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뜻처럼 쉽지 않은 경지였다. 단지 런던의 명화들을 맨손으로 만지는 기쁨으로 버텼다. 틈틈이 격려 해주신 고마운 분들도 기억난다. 그것도 노하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읽어준 ‘한인헤럴드’ 독자들에게 내가 아는 런던의 명화지도를 소개하며 낡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대신하고 싶다.
이태리 르네상스를 만나고 싶다면, 내셔널갤러리와 왕실수집품(Royal Collection)을 찾아보아야 한다. 프란체스카, 라파엘, 다빈치, 마사초, 두치오, 티치아노 등이 기다리고 있다. 북구 르네상스의 명화들과 이야기 하고 싶다면, 내셔널갤러리와 대영박물관, 왕실수집품 등에서 매력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얀반아이크, 뒤러, 크라나흐, 한스홀바인, 로베르캉팽, 보스, 브뢰겔 등의 빛나는 솜씨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크의 교묘한 스케일을 느끼고 싶으면, 내셔널갤러리, 월리스콜렉션, 덜위치픽처갤러리, 코톨드갤러리 등을 둘러보기 바란다. 카라바조, 카라치, 푸생, 램브란트, 벨라스케스, 클로드, 베르메르, 루벤스, 반다이크 등 수많은 거장들이 서늘한 붓자국을 남겨놓고 있다. 로코코의 섬세함을 원한다면, 월리스콜렉션, 내셔널갤러리, V&A, 코톨드갤러리를 여행하면 된다. 와토, 프라고나르, 게인즈버러, 티에플로, 카날레토 등의 부드러운 솜씨가 안내해 줄 것이다. 신고전주의에 느낌이 꽂힌다면 내셔널갤러리, 왕실수집품, 서머셋하우스, 테이트브리튼 등에서 시간을 보내면 좋다. 레이놀즈, 스텁스, 호가스, 앵그르 등의 세밀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낭만주의의 황당한 상상력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테이트브리튼, 내셔널갤러리, 대영박물관 등을 방문해야 한다. 콘스터블, 터너, 블레이크, 들라로슈, 드라크로아 등의 장엄한 예술혼이 걸려 있다. 라파엘전파의 우아한 반동이 마음에 드는 이들은 테이트브리튼, 왕실소장품, 로열아카데미 등에서 로제티, 밀레이, 번존스, 홀만헌트를 감상하기에 적합할 것이다.
인상파를 진정한 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이라면, 코톨드갤러리, 내셔널갤러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르느와르, 마네, 모네, 세잔, 고호, 고갱, 쇠라 등의 역설로 가득찬 붓자국을 느끼게 된다. 이십 세기 초의 복잡한 여러 가지 실험의 양상들을 파악하고 싶다면, 테이트모던, 코톨드갤러리, 에스토릭콜렉션 등을 방문하기 바란다. 피카소, 마티스, 블라크, 칸딘스키, 보치오니 등의 젊음을 느껴 볼 수 있다. 1차, 2차 세계 대전 즈음의 미술가들의 예술혼의 바닥을 들여보고 싶다면, 테이트모던, 제국전쟁박물관, 테이트브리튼 등에서 진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뒤샹, 달리, 밴니콜슨, 사전트, 모딜리아니 등의 심각한 예술혼의 반항을 만난다. 전쟁후의 세계미술의 추상으로나 팝으로의 흐름을 확인하고 싶다면, 테이트모던, 로열아카데미, 테이트브리튼, 헤이워드갤러리 등으로 가서 프란시스베이컨, 잭슨폴록, 데이빗호크니, 루시안프로이드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오늘날의 미술 동향을 몸소 느끼고 싶다면, 테이트모던, 사치갤러리, 로열아카데미 등을 찾아가 살아있는 이 시대 화가들의 역동적 미에의 집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늙은 런던이 아름다운 것은 폭넓은 다양성이 유지해내고 있는 균형미 때문이다. 어느 한곳으로 치우치기에, 늙은 런던은 너무도 다양한 관심사를 보여주고 있다. 늙는다는 것도 아름다움을 향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런던의 그림들에서 맡은 퀴퀴한 향기였던 셈이니, 우리 모두에게 태양은 비쳐지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됨은 행복이다. 런던의 그림들은 줄기차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당신이 어찌 외롭다고 말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