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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96
화가의 두번째 부인/ 윌리엄 돕슨
Portrait of the Artist’s second Wife/ William Dobson
그림.JPG

 
어느 사랑의 눈망울
영국이라는 섬나라가 유럽대륙에 제대로 명함을 내미는 것은 전제왕조의 틀을 갖추는 16세기 튜더 왕조시대부터 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의 ‘위대한 딸’ 엘리자베스 1세 때는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해적식 전법으로 무찌르고 해상권을 독점하며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따라서 영국의 르네상스는 유럽대륙에 비해 뒤늦게 찾아온다. 영국 르네상스의 꽃은 셰익스피어라는 거인을 비롯해 밴 존슨, 크리스토퍼 말로 등의 극작가를 배출한 무대 예술이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영국 미술을 유럽 대륙의 수준과 비슷하게 끌어 올려준 것은 영국 왕실의 궁정화가를 지낸 한스홀바인(독일, 1497~1543)이나 반다이크(플랑드르, 1599~1641) 같은 외국 화가들이었다. 
영국 미술가들이 독자적으로 유럽 미술과 비슷한 경지에 올라서게 된 것은 로코코 시대가 되면서부터다. 영국화가들을 무시하였던 영국귀족들에게 붓의 위력을 실감케 해준 윌리엄 호가스(1697~1764)를 영국 미술 최초의 거장으로 보는 것은 그러한 연유다. 윌리엄 호가스는 민중미술의 뿌리가 되는 화가로, 서양 미술사 속 최초의 주연급 영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최초의 라이벌’ 조슈아 레이놀즈와 토마스 게인즈버러, 터너나 콘스터블 같은 최고의 낭만파 화가들, 그리고 라파엘 전파 같은 공격적인 새로운 유파를 배출하며, 영국은 서양미술사의 새로운 주역이 된다. 따라서 바로크 시대의 영국 미술은 그저 방관자적 입장을 지니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영국 화가로 오늘날 활발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화가가 윌리엄 돕슨(1611~46)이다. 반다이크를 이어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되면서 ‘잉글랜드 내전(English Civil War, 1641~53)’의 생생한 증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화가가 돕슨이다. 그는 내전 당시의 정치적 인물들, 특히 왕당파들을 그려낸 초상화가였다. 반다이크의 영향을 받은 그의 그림에서 돕슨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내려는 것이 작금 영국 미술계의 움직임이다. 내셔널갤러리에서 윈저성까지 런던의 곳곳에 돕슨의 초상화가 보관되어 있다.  돕슨의 그림 중에서 필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테이트브리튼에 전시되고 있는 초상화 ‘화가의 두번째 부인(1640)’이다.                           
사진의 발달과 더불어 급격히 침체되는 게 초상화다. 사진이 생기기 이전의 옛 초상화들은 당당하게 사진이 보여주지 못하는 묘한 매력을 보여준다. 사진이 도저히 포착하기 힘든 지점을 만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숨겨진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화가라는 살아있는 렌즈가 잡아내는 추억의 마력이다. 화가가 바라본 대상으로서의 피사체 인간의 모습, 그 안에는 화가가 지닌 걸쭉한 감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볼만한 것은 바로 그러한 화가만이 짐작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인간이라는 동물의 숨겨진 매력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의 매력, 그것은 추억이라는 예술의 속성과 맞닿는 초상화의 특급 원리에 해당한다. 
돕슨의 초상화는 반다이크의 것에 비해 세밀함이 덜한 대신 보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영국 미술계의 평가다. 부드러움 속에 드러나는 돕슨의 날카롭고 까칠한 붓터치는 백 년 후에 등장하는 윌리엄 호가스 스타일을 이미 보여준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권력과 부를 지닌 강한 인간들을 그리면서도 그들의 약한 면을 포착한 화가가 돕슨이었다는 것이다. 반다이크의 훌륭한 초상화들에 비해 화가의 감성이 훨씬 더 녹아 들어 보인다는 것이다. 돕슨의 감성이 가장 순수하게 전해져 오는 이 조그만 초상화는 화가의 사랑했던 여인이다. 화가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화가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쥬디스(Judith)라는 여인이다. 그녀는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도도함을 지닌 전형적인 영국 여인의 모습이다. 그녀의 시선은 차분하면서도 초롱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싸늘하다. 묘한 여성적 양면성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조그맣지만 앙증맞을 정도로 또렷한 이목구비는 우리가 보아왔던 많은 영국 여인들을 떠올려 준다. 미녀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비롯하여, 모델 케이트 모스나 싱어송라이터 케이트 부시 등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친숙함을 주는 이 초상화의 효과는 얼굴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밀하지 않은 다른 부분들의 까칠한 묘사가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의 매력적 시선을 살아있게 만드는 진정한 힘은 화가의 따스한 사랑의 눈이다. 품격과 저속함의 중간에 서 있는듯한 여인, 정숙과 음탕의 중간에 서 있는듯한 여인, 감춤과 벗김의 중간에 서 있는듯한 여인의 매력을 화가의 사랑스러운 눈길은 마주쳐 따스하게 잡아 내고 있다. 이 조그만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내가 철없는 관음증 환자가 된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엿보고 있는 것은 C컵을 훌쩍 넘을 것 같은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만은 아니다. 삼백칠십 년 전 영국에 실존했던 어느 사랑의 눈망울을 나는 엿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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