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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52
빨강 노랑 파랑의 조화/ 몬드리안
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 Piet Mondrian

 

신비를 따르는 독창성 

 

 

신비로움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기는 싫다. 신비로움이 남겨진 우주에서 신비로움이 남겨진 사랑과 더불어 신비로움이 남겨진 인생을 살고 싶다. 신비로움을 따라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처량하지만, 때때로 기쁨으로 가득 찬 시간이기도 하다. 신비로움이란 절망과 희망, 남자와 여자, 흑과 백이 어우러진 곳에만 존재하는 세상의 원리 같은 것이다. 신비로움을 찾아 헤매던 화가들이 당도한 곳은 ‘추상’이라는 동굴이었다. 자연을 왜곡시키는 화가들의 감정의 색과 형태는 표현주의를 넘어서 추상이라는 신비스러운 동굴까지 다다랐다. 추상화의 선구자중 한 명인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1872~1944)의 말년의 대표작 ‘빨강 노랑 파랑의 조화(1939~1942)’는 테이트모던에서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다. 이 그림의 헤매임을 관찰하는 것은 현대 추상미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로 불리는 몬드리안의 후기 작품들을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다. 두께를 지닌 검은 선들, 수직선과 수평선들, 그것들이 이루어내는 갖가지 사각형들 그리고 드문 드문 배치된 삼원색들이 전부인 그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형상도 거부한 채 우연처럼 이루어진 모습이다.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따라서 화가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무엇을 그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를 상상해 보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저 보이지 않던 무엇들이 보이게 된 것을 즐기면 된다. 이 세상에 없는 무엇, 새롭게 탄생된 무엇을 즐기면 된다. 그걸 즐기는 데 필요한 것은 약간의 배짱과 약간의 뻔뻔함과 약간의 상식을 동반한 놀라움뿐이다.  
덕지덕지 칠해진 듯한 매끈하지 않은 이 그림의 실물을 보면 놀라움이 더해진다. 이 우연한 선들의 교차로들이 오랜 고민과 번뇌의 흔적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교차로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란 말인가. 화가들이 묘사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획득하는 ‘비구상’이라는 개념은 몬드리안이 활동한, 1917년 시작된 ‘드 스틸(De Stijl)’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어느 것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미술, 추상적 원리를 추구하는 미술이다. 그러나 잠깐,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그런 머리 아픈 원론적 개념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을 이야기하는 게 이롭겠다.

신지학은 신비로운 신의 영역을 인정하는 일종의 종교철학으로 19세기말 네덜란드에서 번성하였다. 캘빈주의의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엄격한 영적 수련을 거친 몬드리안은 인도철학과 신지학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비적 체험이나 비의적 가르침을 인정하는 신지학의 특성을 파악하면 몬드리안을 이해하기 아주 쉬워진다.  종교인들이 인간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방언(glossolalia)으로 기도하는 것은, 신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계획에 따르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의 영역을 인정하고 본질을 추구하려는 기도 속에서 인간의 언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따라서 방언기도 속에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와 몸짓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다. 나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다. 자연의 조화로움은 화가들이 수천 년 모방해 왔던 자연의 외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된 어떤 감정이나 정신의 규칙과 더욱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몬드리안의 미술이다. 세상에는 남과 여, 음과 양, 흑과 백이 존재하며 그 사이에 세상의 모든 풍경과 관계가 존재한다. 그 법칙과 질서를 찾아 내는 것은 예술가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몬드리안의 직계 후배라 할 영국의 추상화가 밴니콜슨(1914~78)은 자신의 예술행위를 종교와 흡사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그림을 보자. 수직선과 수평선들은 음과 양, 혹은 남자와 여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일정하지 않은 검은 선 사이의 간격들은 동일한 조건의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차이점을 의미한다. 경제적, 교육적, 신체적 차이처럼 환경 혹은 성격이 유발시키는 긴장의 간격들이다. 검은 선들은 수많은 교차점을 형성하고 있다. 교차점들은 인간 혹은 사물들이 형성하는 만남을 의미한다. 여기에 이 그림의 하일라이트인 삼원색이 배치되어 있다. 노랑은 블리드된 채 왼쪽 맨 위에 자리하고 있다. 온전히 검은 선에 쌓인 빨강은 오른쪽 아래에 심사숙고한 위치에 있다. 거기서 떨어져 나온 조그만 빨강은 검은 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얇은 파랑은 검은 선 세 개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지나치게 신비롭다. 몬드리안이 파악하고 잡으려 했던 세상의 보이지 않는 조화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심한 오리지널리티를 지니고 있다. 몬드리안의 이런 실험 이후 모든 화가들은 수직선과 수평선의 어지러운 관계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패션디자이너들도 그렇다. (이브 생 로랑은 몬드리안을 패션에 활용한 바 있다.) 몬드리안 이후 화가들은 이 세상에 새로운 조화와 균형의 미를 선보이는 데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추상화의 독창성은 그런 초월의 매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몬드리안을 초월해야 하는 이유도 그 언저리에 있다. 독자도 독창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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