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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97
야채와 과일, 그리고 하녀/ 나다니엘 베이컨
A Cookmaid with Vegetables and Fruit/ Nathaniel Bacon

 그림.JPG

고품격 자부심
영국은 클럽(club)의 나라다. 클럽이란 공동의 목표나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의 모임, 즉 우리말로 동호인모임, 더 최근의 용어로는 동아리 등을 의미한다. 영국은 17세기부터 클럽문화를 발전시켜온 클럽천국이다. 노숙자들도 클럽활동은 열성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취미문화를 선도했던 영국의 저력은 자율적 미의식을 보편화시켜 앞선 문화의식을 창조했다는 데 있다. 영국식으로 해석해 보면 취미란 어쩌면 인간의 참된 축복이다. 삶의 영위를 위해 할 수 없이 지녀야 하는 직업적 노동이 타율적인 것인데 반해, 취미란 얼마든지 자율적으로 미의식을 느낄 수 있는 즐거운 노동이자 건강한 놀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바다의 시대에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을 취미문화가 지배했다는 사실은 영국으로서나 세계로서나 퍽 다행이었던 셈이다. 지구의 사분의 일을 다스리던 최강의 나라 대영제국에 취미문화 대신 배금주의나 향락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면, 아마도 지구는 돈과 섹스로 얼룩진 말 그대로 개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의 소박한 국민성에 일조를 한 것도 취미문화라고 생각한다. 확고한 취미를 통해 세상의 비밀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탐욕과 사리사욕으로부터 의연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일류대학일수록 지원서에 커다란 취미란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도자일수록 취미가 필요하다. 취미 없는 지도자의 관심사는 쉽게 거둬들일 수 있는 돈과 사리사욕으로 얼룩질 것이다. 자녀를 지도자로 키우기를 열정적으로 갈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이 기를 쓰고 자녀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것을 보는데, 보다 세심한 판단력으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지도자이신 국회의원님들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적극적으로 가르칠 것을 건의하고 싶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도 취미의 나라 여왕답게 많은 취미를 지닌 할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비장의 취미의 하나가 성대모사라는 사실은 우리를 실소케 한다. 그녀의 우아한 입에서 최병서나 김학도 같은 목소리 흉내가 튀어나온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그녀의 또 다른 비장의 취미는 경마 도박의 배팅이다. 유년기부터 혹독하게 승마교육을 받은 ‘말 타기의 달인’ 할머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숨막히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 필요한 때문일까.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마츄어 화가는 서포크 지방의 대지주였던 나다니엘 베이컨(1585~1627)이다. 그는 단 몇 작품만이 전해지고 있는, 전문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아마츄어 화가다. 런던의 ‘국립초상화 미술관’에 걸린 그의 자화상은 당시 영국의 초상화로서는 걸작에 해당한다. 빛을 활용하는 그의 테크닉은 당시 영국의 작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고 균형감 넘친다. 베이컨은 당시에 그런 그림을 그린 영국인이 과연 있었나 싶은 특이한 소재의 작품 몇 점을 남겼는데, 먹거리들 사이에 하녀를 배치한 일련의 그림들이다. 정물과 초상과 풍경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양식으로 당시의 미술 선진국 네덜란드의 몇 화가들이 구사했던 장르다. 테이트브리튼에 전시되고 있는 ‘야채와 과일, 그리고 하녀(1620~25)’는 그런 희소성 있는 영국 미술사의 기이한 진품 명품에 해당하는 수작이다.
식품 창고 안에서 한 하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녀는 창고에 보관된 각종 야채와 과일 들 속에 서 있다. 배추와 호박, 무 같은 풍성한 채소들을 집요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배추의 위용은 대단해서 새삼 김치의 위대함을 전해주는 것 같다. 왼쪽에 위치한 과일들은 벽에 매달린 꽃다발과 어울리도록 다양하고 빛깔 곱다. 문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이 그림에서 가장 어색하게 묘사된 부분인데, 정물들에 비해 세심하지 못하게 그려져 있다. 베이컨이 풍경화에 조금 약했던 걸까? 그러나 그 어색함이 이 그림 안에서는 제법 효과적으로 보이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풍성한 야채와 과일들 사이로 보이는 어색한 풍경이 흡사 무릉도원처럼 보이는 것이다. 무릇 무릉도원이란 아무도 보지 못한 곳이므로 일종의 상상의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녀는 굉장히 멋 적어 보인다. “별 걸 다 시켜!”라는 대사를 묵음으로 처리하고 있는 만큼 억지 미소가 좀처럼 새어 나오지 않고 있다. 특별히 포즈를 위해 베이컨이 선물한 듯한 말쑥한 새 옷도 그저 거북스러워만 보인다.
이 그림이 놀라운 것은 각별한 아마추어의 고품격 자부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새로운 소재를 독보적으로 그린 것도 그렇고, 묘사하고 싶은 채소 쪼가리들이나 과일 덩이들을 위해 빛의 통일감 따위는 ‘개나 줘버린’ 배짱이 그렇다. 이런 두둑한 배짱은 아마추어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대가 없는 자율적 미에의 도전의식을 지닌 아마추어들은 돈이라는 올가미에 포획된 화려하지만 불쌍한 프로들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이란 시나브로 고품격 자부심이 되어 세상을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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