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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81
자화상/ 살바토르 로사
Self Portrait/ Salvator Rosa

 
그림.JPG


침묵의 반항
 
화가들의 자화상이 때로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경우가 있다. 시공을 달리했던 어느 화가의 자화상이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놀랍도록 친숙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그림을 만나면 우리는 안도하게 된다. 그것은 이 험한 세상에서 시시하게 그림이나 바라보는 일이 그저 무익한 헛노릇은 아니라는 가느다란 위안일 것이다. 필자에게도 그런 느낌을 선사한 어느 화가의 자화상이 있다. 그 자화상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놀란 고양이처럼 자꾸 뒷걸음질 쳤다. 뜻하지 않은 곳에 걸려 있는 거울을 통해 바라본 뜻밖의 자신의 모습에 놀란 동물처럼 자꾸 뒷걸음질 쳤다. 그 자화상을 수십 번 더 보고 나서야 나는 그 뒷걸음을 간신히 멈췄다. 마치 자신이 매복해 있는 지점의 좌표를 확인한 침투부대원처럼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자리, 나를 나이게 해주는 그 자리, 나를 나여야 마땅하게 해주는 그 자리, 나를 나 아닌 그 무엇도 되지 못하도록 막고 선 압도적인 권위의 그 자리, 실존이라는 거창한 앙갚음의 그 자리. 내 삶이 씹다 붙여 놓은 껌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바로 그 자리.  
이태리 바로크 시대의 화가 살바토르 로사(1615~73)의 묘한 ‘자화상(1645년쯤, 내셔널갤러리)’이 바로 그 자리를 제공한 그림이다. 어느 구름 낀 젊은 날 덕수궁 석조전 근처에서 취한 나의 포즈 같은 그림. 햇빛을 바라보기도 지쳐 있던, 그저 죽고 싶기만 하던, 그러나 도도한 자존심 하나로 세상을 저울질하던 뻔뻔한 모습, 뽀송뽀송한 자존심 두 쪽만 달랑 차고 있던 젊은 시절 나의 모습 같은 그림.
살바토르 로사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역량은 대부분 그의 반인습적이었던 이단적 풍모에서 온다. 나폴리 출신으로 전쟁화와 풍경화로 이름을 얻는 그의 그림은 당시 로마의 전통적 화풍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존재하였던 것 같다. 그의 풍경화들은 클로드나 푸생의 정통성 반대편에 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많은 적들을 두어야 했다고 미술사는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후원자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으려 했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림 값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열정이 솟구칠 때만 붓을 잡았다는 그의 그림들은 당시의 다른 화가들보다 확실히 튄다. 그의 그림은 뭔가 색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한데, 드라마틱하다고 할까, 다분히 세상에 대해 품은 불만이 나타나 있는 것 같고, 어찌 보면 위악적인 듯도 하다. 훗날 ‘낭만’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은 살바토르 로사를 떠올려야 하였다. 그는 오늘날 ‘원시낭만주의 화가’로 불린다. 영국의 낭만주의자들에게 열렬히 사랑 받았던 그의 그림을 그러나 후대인들 모두가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의 평론가 러스킨은 그를 악마에게 감염되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가 서른 즈음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자화상도 자세히 보면 상당히 이색적이다. 스토아학파 철학자를 연상시키는 그의 복장부터가 그렇다. 갈색 망토를 걸치고 모자를 쓴 모습은 아무래도 일반적인 화가의 모습은 아니다. 화가뿐 아니라 음악가, 시인, 풍자가 등으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던 로사다운 모습이다. 그가 들고 있는 판에 쓰여진 라틴어는 이 그림의 사족처럼 존재한다. ‘너의 말이 침묵보다 가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면 침묵하라’……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가였던 피타고라스의 일성이다. 배경의 전부는 하늘이다. 구름에 반쯤 가리워진 하늘, 서늘한 하늘이다. 로사의 색감에서는 언제나 서늘함이 느껴진다. 그 서늘함을 화가 자신도 알고 있었던 듯 하다. 화가의 표정이 말하고 있다. 잔뜩 힘을 주었으나 그림자에 의해 음각된 두 눈과 굳게 다물었으나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듯한 얇은 입술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다. 세상에 대한 화려한(?) 불만을 지닌 채 마치 우리를 심문이라도 하려는 듯이 도도하게 서 있는 표정. 망토 사이로 튀어 나온 왼손마저 서늘한 응달의 색감처럼 어둡기만 하다. 
로사의 특이한 이력과 유별났던 성품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자화상은 일반적 자화상의 모습에서 일탈한 모습이다. 냉소적이고 서늘한 표정으로 서늘한 응달에 서 있는 자화상이다. 게다가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이 더 가치 있을 수 있다는 고대 성인의 잠언을 들고 있다. 거만하다고 보기에 지나치게 진지한 자세다. 침묵으로, 어떤 웅변보다 강렬한 무언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화가의 열정이 엿보인다. 로사는 사회에 저항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풍자가였지만, 그가 겪었을 세상에 대한 실망이나 불만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지니고 있다. 그 세상에 대한 불만을 숙성시키고 발효시키는 가운데 우리 인생은 깊어 간다. 그 오래 숙성된 우리의 불만을 어떻게 다듬고 연주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우리가 응달에 서서 침묵하며 반항하고 있을 때, 세상은 바뀌어 갈 것이다. 당신의 무언의 반항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당신 아내와 혹은 남편과, 당신 이웃과 당신 선생님과, 당신 대통령 모두가 당신의 침묵의 반항으로 바뀌어갈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술을 통해 꿈꾸는 소박한 세상의 전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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