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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만나는 런던

그림으로 만나는 런던-77
찰스 1세의 기마초상/ 반 다이크
Equestrian Potrait of Charles Ⅰ/ Anthony Van Dyck

 그림.JPG


역사가 사실이라면 

1649년 1월 30일 오후 2시경, 음산한 런던이 더욱 음산해 보였다. 밴퀴팅하우스(Then Banqueting House) 앞에는 이미 천명 이상의 시민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모여 들었다. 지연되고 있었다. 왕의 아들의 집권을 막으려는 국회의 갑작스런 안건 처리 때문이었다. 몇 시간 후, 집행을 맹렬히 거부했던 망나니에게 무거운 마스크가 씌워진 채 참수가 거행되었다. 망나니의 단 한방에, 왕권은 신이 내린 것이라고 외치던 왕의 목은 잘려 나가고 말았다. 왕의 피가 교수대를 타고 흘러 내렸다. 시민들은 저마다 손수건에 왕의 피를 찍어 묻혔다. 이 생생한 역사의 비극을 어떤 식으로든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참수되었던 유일한 영국왕 찰스 1세는 그 비극적 인생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편이다. 흘러간 미국 배우 로버트본(0011 나폴레옹 솔로?)을 연상시키는 그의 잘 생긴 얼굴을 우리는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무리한 종교 정책으로 결국 내전을 거쳐 몰락의 길로 빠지는 무능한 왕이었던 그는, 그러나 우리에게 너무도 멋진 영국 왕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의 초상화는 언제나 품위와 교양을 위해 배려된 준수한 수작들이었다. 그의 궁정화가였던 안토니 반 다이크(1599~1641)의 빛나는 솜씨가 보여준 생생한 역사의 거울들이다.
반 다이크는 독일인 한스 홀바인(1497~1543)과 더불어 영국 미술에 결정적 기여를 한 선구적 외국 화가다. 독일 르네상스의 초상화 거장 홀바인이 헨리 8세의 궁정화가를 지내며 영국미술의 눈을 뜨이게 해줬다면, 플랑드르 미술의 적통을 잇는 바로크의 대가 반다이크는 답보된 영국미술에 새로움을 수혈한 인물이다. 반다이크는 루벤스의 수제자였다. 그는 절대적 대가 루벤스의 빛에 가려지는 걸 참을 수 없었는지, 영국의 초빙에 흔쾌히 응하여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스튜어트왕조의 세련되고 우아한 초상화들은 그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항상 최신의 미를 구사하려고 하였으며, 인물의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배경을 날리듯이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표현법은 훗날 오랫동안 영국미술을 지배하는 기법이 되었다. 
내셔널갤러리의 가장 웅장한 그림 가운데 한 점인 ‘찰스 1세의 기마초상(1637~1638)은 거의 4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다. 찰스 1세는 건장한 말에 탄 채 군대와 국가를 지휘하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왜소했다는 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위엄 넘치는 모습이다. 견고하면서도 둔탁해 보이지 않는 그리니치 갑옷을 입고 긴 칼을 찬 채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건 목걸이에는 성인 조지상(St. George)을 그려 넣음으로써 신이 부여한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단축법으로 표현된 하얀 얼굴은 그가 루벤스를 후원했던 세련된 교양을 겸비한 유식한 왕임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얼굴이 앞모습도 아니고 옆모습도 아닌 이유는 모든 방향과 각도를 책임질 수 있는 왕의 통찰력을 보여주기에 적합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무에 걸린 명판에는 그가 영국의 왕임이 라틴어로 표기되어 있다. 뒤에서 시종은 화려한 깃털이 달린 투구를 들고 서있다. 배경은 반다이크의 초상화의 특징이 되어버린 거칠고 음습한 야생이다. 티치아노의 영향을 받았음을 한 눈에 알아볼 만큼 티치아노풍의 하늘과 나뭇잎들이다. 젊은 시절 이태리로 간 반다이크는 특히 티치아노에 매료되어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따스한 갈색감을 주는 배경의 색감은 그의 스승 루벤스의 영향으로 보인다. 따스한 색감의 덧칠과 쓸어내는 듯한 붓터치는 반다이크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왕의 초상화는 일종의 역사화에 해당한다. 역사가 실제 하지 않는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듯이, 역사화도 화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실제 했던 것을 바라본, 혹은 상상한 화가들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우리는 때로 믿고, 때로는 심하게 불신하기도 한다. 예컨대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을 우리는 믿지 못한다. 로마의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초라하고 흉측한 용모의 소유자라고 묘사한바 있으나, 대영박물관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그의 초상은 대단히 수려하다. 역사는 하나의 이야기가 변신하는 과정의 모습에 다름 아닌지도 모른다. 하나의 이야기에 끝없이 살이 붙고, 화장을 하고, 쌍꺼풀 수술을 하고, 지방 흡입을 하는 과정.
역사는 언제나 상대적이고 상투적이고 비위생적이다. 역사를 어디까지 믿을 것인지는 우리 모두에게 부과된 주관식의 숙제다. 그 난공불락의 숙제를 평생 풀다가 가는 우리에게, 옛 화가들의 역사화들은 동네 문방구에서 팔던 참고서 같은 것이다. ‘찰스 1세의 기마초상’도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웅장한 말에 당당하게 앉은 위대한 왕의 초상, 보무타려(保無他慮),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모습. 그러나 그 모습은 신하들에게 처형당한 가장 실패한 왕, 무능한 왕의 세련된 위선이어야 옳다. 역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반다이크의 수려한 필력이 또한 사실이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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