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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2010

hherald 2010.07.15 14:25 조회 수 : 2291


한 남자가 큰 가방을 들고 1호선 수원행 지하철에 올라탔다. 남자는 가방을 바닥에 놓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헛기침을 몇 번하더니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여러분 앞에 나선 이유는, 갈 길 가시는 걸음에 좋은 물건 하나 소개 시켜 드리고자 이렇게 나섰습니다.
직접 물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자 플라스틱 머리에 솔이 달려 있습니다. 자 대체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 칫솔입니다. 이걸 왜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물론 팔려고 나왔습니다. 한 개에 200원씩. 다섯 개 묶여 있습니다. 얼마이겠습니까? 1000원입니다.
뒷면 돌려 보겠습니다. 영어가 적혀 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수출했다는 것입니다. 수출이 잘 됐겠습니까? 폭삭 망했습니다. 그래서 들고 나왔습니다. 자 그럼 여러분에게 한 묶음씩 돌려 보겠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칫솔 한 묶음씩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칫솔 묶음을 다 돌린 후에 남자는 연설을 계속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제가 몇 묶음이나 팔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궁금하십니까? 저는 더 궁금합니다. 잠시 후에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 자 여러분 칫솔 네 묶음 팔았습니다. 총 매상이 얼마이겠습니까? 예, 칫솔 5개짜리 네 묶음 겨우 4000원입니다. 제가 실망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물론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기에서 포기하겠습니까? 포기 안 하겠습니까? 예,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음 칸으로 갑니다."

인생은 큰 가방을 들고 객차 칸을 건너가며 칫솔을 팔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돌아보면 어떤 칸에서는 뜻 밖에 벌어진 일들로 유쾌한 기억도 있지만, 어떤 칸에서는 마음의 상처로 남아버린 아픈 기억도 있다.

 

2009년은 정말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사서 이사간지 칠 년이 지난 집은 이것저것 망가지기 시작했고, 하다못해 자동차까지 속을 썩히더니 아는 정비소에 맡긴 수리가 결국 해를 넘기고야 말았다. 지난해 3월에 맡긴 수리였다.
엎친 데 덮친다고 기르던 고양이까지 새끼를 낳으며 애를 먹였다.
새벽부터 산통이 시작되어 안절부절 못하더니 아뿔싸 머리부터 나와야 할 새끼가 한쪽 발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토요일이라 집 앞에 있는 가축병원도 문을 닫았고 근처 어느 곳에서도 진료를 하는 병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겨우 찾은 곳으로 차를 몰고 달려갔더니 난산이라며 고양이를 입원시키고 돌아가란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녀석도 꺼꾸로 들어앉아 수술을 해서 꺼냈는데 고양이 새끼까지 그 모양이었다. 고양이를 데려오는 길에 운전대를 잡고 되는 일이 없다고 투덜댔더니, 옆에 앉아있던 아들녀석이 새끼 두 마리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을 받는다.
그 일은 하염없이 꼬이게 될 2009년 한 해의 분위기를 알리는 서곡에 불과했다. 정말 최악의 한 해였다.

그렇지만 인생은 2009년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2009년의 일들은 내 인생의 밑바닥으로 스며든 거름이 되어 새로운 미래를 여는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09 객차 안에서 칫솔을 팔던 한 남자의 우스꽝스런 독백은, 스스로를 향한 격려이자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어진 나약한 자신을 향한 질타의 소리였다.

 

남자는 비교적 냉소적인 여러 객차들을 경험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고 때론 화가 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나 자신을 아끼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내 안의 진정한 내가 있다는 사실’을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남자 스스로 자기확신을 가지려는 심산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남자의 독백을 들으며 비웃듯이 ‘피식~’ 웃겠지만, 남자에게는 자신의 소중함을 각인시키는 또 하나의 ‘버자이너 모놀로그 The Vagina Monologues’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다음 칸으로 건너왔다.
2010 객차 앞에 서서 큰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흔들리는 객차의 손잡이를 잡는다. 2009 객차 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 냉소적인 객차의 분위기도 이젠 그다지 낯설지 않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잘난 자존심도 이젠 제법 여유가 있어졌다.
"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갈 길 가시는 여러분의 인생길에 꼭 소개할 분이 있어서 이렇게 나섰습니다...”

 

 

박일배목사는 잡지사기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했으며 Surrey University(M.A) 및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했다.
지금은 런던열린교회를 섬기고 있다.
blog.naver.com/cudding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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