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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아내의 로망

hherald 2010.07.17 20:26 조회 수 : 1059

다시 깔아놓았다. 한국은 정말 재미있는 나라다.
그 다음날은 짬을 내어 종로에 있는 보석도매상가를 찾아갔다. 그곳에 가면 보석상에서 깨끗한 중고명품시계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수백 개가 넘는 가게에서 아내가 원하는 시계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격도 만만(?)했다. 영국에서 새것을 구입하는 가격의 35%선이면 거의 새것에 가까운 시계를 구입할 수 있었다. 아내가 원하는 모델에 줄의 길이까지 맞는 놈을 찾았다. 중고딱지가 어색할 만큼 깨끗하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지갑에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털면 살 수 있는 가격이었고 ‘지금 사지 않으면 평생 후회를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몇 번이나 시계를 꺼내봤는지 모른다. 집회를 마치고 받은 강사 사례비를 딸랑 털어 시계를 구입한 엽기목사가 되었지만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생일을 음력으로 짚어보니 20일쯤 남았다.
“그 때까지 시계를 감춰둬야 하는데...” 이만하면 행복한 고민에 해당될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시계부터 꺼내놓는 한심한 나 자신을 정말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뜻 밖의 선물을 받아 든 아내는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감격했다. 그런 아내를 바라보면서 일찍 꺼내주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마음에 너무나도 기뻐하던 아내의 예쁜 얼굴이 각인된다. 나 스스로에게도 나이 칠팔십을 넘어 틀림없이 돌아보게 될 감격스런 순간이었다.아내는 오메가 시계를 갖고 싶어했다. 15년 세월이 지나면 취향도 바뀌고 맘도 바뀔만한데, 그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이 바뀐 적이 없었다.
<Omega Constellation> 아내의 로망이다.
대개 사람들은 ‘스틸stainless steel’에 ‘골드 18ct gold’를 보기 좋게 섞어놓은 콤비를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냥 심플하고 깔끔한 스틸을 좋아했다. 가장 싸고 기본적인 모델이다. 사주지도 못하면서 ‘스틸을 좋아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5년간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해마다 ‘내년...’ 타령을 했다. 아내의 생일이 다가오면 보석가게를 지나치다가도 걸음을 멈추고 오메가 시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사실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줘야지...”
우리 형편에 무슨 명품시계냐고 아내에게 쓴 소리를 해야 마땅했지만 그것만은 꼭 사주고 싶었다. 해마다 쇼 윈도우에 진열된 시계의 가격을 확인하지만 기본 모델이라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 동안 모델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선이 좀 더 부드러워지고 느낌이 좀 더 우아해졌다는 것뿐이다. 몇 번이고 카드로 긁고 싶은 충동을 참고 또 참았다. 카드 빚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내의 성격에 카드로 긁은 시계를 생각 없이 차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쌈지돈을 모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없는 형편에 쌈지돈이 꼬박꼬박 얌전하게 쌓일 리가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엉뚱한 곳으로 모아 둔 돈이 끌려들어갔다.
5년 만에 다니러 간 한국에서의 바쁜 일정 가운데 해결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스크린이 망가진 채로 지난 일년간 사용했던 노트북을 수리하는 일과 안경을 새로 하는 일도 꼭 해결해야 할 일들이었다. 5년 동안 시력도 변했지만 노안이 심해져서 다초점 렌즈가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평택에서 노트북을 들고 삼성서비스센터를 찾아갔더니 수리비 견적이 너무 많이 나와 그냥 새로 구입하는 편이 낫겠다는 진단이 나왔다.
친구목사가 담임으로 목회를 하는 교회에서 사흘간 말씀사경회를 인도하는 중에, 용산전자상가에 가서 볼일을 봐야 한다는 친구목사를 따라 나섰다. 그곳에서 노트북을 맡겼더니 스크린을 새것으로 갈고 하드디스크를 포멧 한 후에 윈도우를 다시 깔아주는 가격으로 12만원을 받는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저렴한 가격이었다. 혹시라도 수리가 여의치 않으면 노트북을 새로 구입할 생각으로 친구를 따라 나섰는데 정말 횡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수리와 서비스를 받는데 걸리는 시간이 불과 두 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냉면을 한 그릇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수다를 떨고 났더니 그 사이에 스크린을 새로 갈고 프로그램을
그 다음날 출근길에 시계를 손목에 걸며 아내가 활짝 웃는다. 못 난 남편을 만나 15년 만에 얻어 가진 겨우 중고시계였다. 그러나 그 시계에는 아내를 향한 내 사랑이 들어있고 지난 15년간의 미안한 마음이 들어있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의 아픔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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