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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을 (乙) 도 행복할 수 있다

hherald 2010.07.17 20:16 조회 수 : 1193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년만의 고국방문이다. 물론 이코노미 클라스, 일반석이다. 대기실에 앉아있었던 수 백 명이나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태우고, 그 무거운 짐까지 때려 실은 비행기가 가뿐하게 하늘을 날아오른다. 경이롭다.

 

5월초와 11월초에 영국상공을 날아 보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5월초에는 영국이 온통 노란 유채꽃으로 뒤덮이고, 11월초에는 집집마다 쏘아 올리는 폭죽으로 영국하늘이 아름다운 불꽃놀이 축제가 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창 밖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밤 비행기에 몸을 싣고 노란 유채꽃밭을 꿈꾸는 것은 낮 비행기를 타고 가이 폭스 Guy Fawkes 나이트의 불꽃놀이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환상이었다. 유채꽃밭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 풍경은 흑백이 된지 오래였다. 영국으로 돌아올 때는 낮 비행기가 되겠지만 그 때는 이미 유채꽃이 다 지고 난 후가 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그 모양이다.

발 딛고 사는 땅에서만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에나 ‘갑(甲)’과 ‘을(乙)’이 있게 마련이다.  하늘을 날고 있는 이 좁은 공간에서도 ‘갑을(甲乙)의 논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을이다.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익숙한 일상이다.

비행기는 재미있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앞자리부터 등급을 나누어 사람들을 앉혀놓더니 하늘을 날아오르기가 무섭게 차별대우를 하기 시작한다. 점유한 공간의 넓이와 수준도 그렇지만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의 수준이 다르다. 하다못해 같은 비빔밥을 먹더라도, 밥을 비비는 밥그릇의 크기가 달라진다. 와인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와인의 수준에서 갑과 을의 차이를 더 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목적지가 같은 여행이다. 더구나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진 스탠다드 옵션이다. 어느 곳에 앉아있는가의 문제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 앞 자리에 영국인 부부가 앉았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몸이 비틀리는 이코노미 클라스에 앉아서도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배려가 느껴지고 남편을 향한 아내의 관심이 느껴진다. 행복해 보인다. 과연 이들에게 ‘갑을의 논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들은 클라스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차피 어디에 앉혀놔도 행복할 사람들이다.
확실히, 행복은 내가 어느 곳에 앉아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어떤 생각을 나누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다.
한국사람들의 신분상승의 욕구는 지나칠 만큼 유별나다. 물론 그런 성향이 국가경쟁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런 성향 때문에 마음이 부대끼고 우울한 삶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이번에 한국을 가면 체면유지비가 좀 들것이라고 조언을 하며 껄걸 웃던 선배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국은 드라마를 보더라도 그렇다. 주인공의 갑작스런 신분상승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스토리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나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영국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의 성숙한 삶의 이해에 대해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들에게서는 우리와 같은 막연한 신분상승의 욕구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분상승을 꿈꾸며 우리가 내 팽개쳐 버린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과 집착이 엿보인다. 퇴근과 동시에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려가는 영국인들의 모습이 아마 그런 집착중의 하나일 것이다. 더구나 주말은 말할 것도 없다.

아내는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서의 팀장이다. 하루는 아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퇴근을 했다.
“참 이해가 안 되는 애들이야”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라 “왜?”하고 물었더니 커피 한 잔을 끓여달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팀원중의 하나에게 승진과 임금인상을 제안했더니 글쎄... 그냥 지금이 맘 편하고 좋다며 고사를 하더라구...”
신분상승에 목마른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매일 밤 늦게 퇴근하고 허구한날 출장을 가는 아빠에게 아들이 전화를 걸었단다.
“아빠 우리 집에 자주 좀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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