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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외유내강 명품내공

hherald 2010.07.17 20:14 조회 수 : 1168

영국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할 수 없는 사고현장을 목격했다.
명품 BMW 자동차와 포드 한대가 정면 충돌한 사고였다. 아깝게도 BMW는 앞부분이 크게 부숴졌는데, 포드 자동차는 그다지 많이 찌그러지지도 않아서 상태가 멀쩡해 보였다. 늘 상상했던 대로라면 BMW 앞에서 포드가 무참하게 부숴졌어야 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식간에 몰려든 경찰차 몇 대와 구급차 두 대가 길을 차단했다. 구급차 두 대에 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이미 옮겨져 있었는데 응급처치를 마친 한 대가 급히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포드에 타고 있었던 승객이라는데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또 다른 한 대도 잠시 후에 사이렌을 울리며 사고현장을 빠져나갔다.
혼자 타고 있었던 BMW의 운전사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외관상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어깨에 담요를 걸친 채 누군가가 건네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서류를 작성하는 경찰 앞에서 뭔가를 설명하면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간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무렵은 한국사람들이 외제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하던 때였다.
벤츠(한국사람들은 그 차를 그렇게 부른다) 승용차와 트럭이 부딪쳤는데 벤츠는 멀쩡하고 트럭이 부숴졌다느니, 영국의 롤스로이스는 자격이 되지 않는 한국 대통령에게도 차를 팔지 않는다느니... 뭐 그런 개그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떡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살다 영국으로 건너온 내게 그 사고현장은 여간 실망스런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막연한 환상이 내 안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최소한 내가 ‘NCAP Test’의 개념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NCAP테스트는 새로 시판 될 자동차의 안전도를 평가하는 충돌시험이다. 그것은 충돌 후에 차가 얼만큼 부숴졌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충돌하는 과정에 차가 어떻게 부숴지는가를 보는 것이다. NCAP의 안전기준과 평가기준은 사고현장에서 차가 상대방보다 많이 부숴지더라도 운전자와 승객을 보호하도록 만들어진 차가 좋은 차라는 것이다. 훗날 그 개념을 가지고 사고현장을 돌이켜보며 역시 BMW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날 사고가 났던 차의 상태를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그만큼 황당하게 느껴졌던 사고였다는 이야기다.
그 때, 빨간색 BMW는 앞의 범퍼부터 보닛 중간까지 구겨놓은 휴지조각처럼 밀려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실망 중에도 내가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 충격에도 앞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색 포드는 범퍼가 깨지고 보닛 앞부분이 조금 찌그러졌을 뿐이었는데 앞 유리창이 쏟아져 내렸다. 충격이 운전석까지 전달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좋은 차는 사람이 다치지 않을만한 충격에서는 차가 망가지지 않는 절대강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지만 더 큰 충격에서는 운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부숴져야 하는 것이다. 차가 부숴지지 않으면 그 충격이 그대로 운전자와 승객에게 전달되어 차가 부숴지지 않은 만큼 사람이 부상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BMW 자동차가 그렇게 많이 부숴졌던 것과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창이 깨지지 않았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성공하는 사람의 처세술쯤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외유내강은 복잡한 관계 속에서 상처가 많아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안전장치이다.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의 이중성이 아니라, 망가져서는 안 되는 깊이 있는 내 자신의 내면을 지키기 위해 번듯한 체면쯤은 과감하게 구겨버릴 줄 아는 명품내공인 것이다.
구겨진 체면은 나를 지켜낸 자부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번듯한 체면을 지키기 위해 내면을 망가뜨리는 싸구려 인생을 선택한다. 명품내공으로 무장한 명품인생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한 사람’은 상대방의 체면을 무참하게 구겨줄 수 있는 두껍고 무식한 철판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두껍고 무식한 철판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구겨지는 체면으로 받아들이며, 소문만 듣고 뭘 모르는 사람들이 조금 실망하더라도, 그 현장에서 문을 열고 기적같이 살아나오는 사람이다.

혹시 이름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실망을 해도 좋다. 사람들이 무슨 BMW가 이렇게 망가지느냐고 실망할 때 NCAP가 그 가치를 인정해 주었던 것처럼, 무참하게 체면이 구겨졌지만 내면을 지켜낸 사람의 가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명품의식이 세상에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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