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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 Episode

hherald 2010.07.17 18:11 조회 수 : 1396

10kg짜리는 32파운드.
15kg짜리는 35파운드.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0kg짜리 김치를 집어 들고 나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통을 열고 두 세 겹 두꺼운 비닐로 밀봉된 포장을 뜯었더니 신 김치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한다. 15kg짜리가 35파운드(7만원)였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팔기 전에 35파운드짜리 15kg는 ‘신김치’라고 표시를 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전혀 뜻밖의 상황이라 잠시 난감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평소에 김치를 즐겨 먹지 않는 우리 집은 지져먹고 볶아먹고 끓여먹기 좋은 신김치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실 신김치가 주인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어빠진 냄새가 진동하는 김치통을 들고 당장 한국슈퍼로 달려가 ‘이래도 되겠느냐’고 따졌을지도 모른다.

김치를 먹기 좋게 큰통 작은통에 적당히 나눠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었다. 처음엔 서툴던 일이 이젠 몇 번 해본 이력이 붙었다고 훨씬 더 수월하고 체계(?)가 잡혔다. 이리저리 김치국물이 튀는 반경도 많이 좁아졌다.
갑자기 횡재한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졸부처럼, 갑자기 냉장고에 가득해진 신김치를 가지고 무엇을 해먹을까 생각에 잠긴다. 그것도 ‘가진 것’의 일종이라고 행복한 고민이 된다.
김치만두? 사실 그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일에 절어 퇴근하는 아내에게 김치만두까지 만들어 먹자고 말할 철면피도 못 된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려가며 신김치를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별미들을 생각해보니까 고작 돼지고기와 참치를 번갈아 가며 넣고 지져먹고 볶아먹고 끓여먹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젠장...
신김치로 만들어 먹을만한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졸지에 음식과 엮여있는 케케묵은 기억들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다지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녹두빈대떡은 몇 년 전에 우리교회를 떠나신 최권사님의 18번이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녹두빈대떡을 먹으며 최권사님의 비법을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녹두를 물에 불려 믹서에 갈고 신김치를 잔뜩 썰어 적당히 물기를 뺀다. 갈아놓은 돼지고기를 충분히 넣는다.

끈기가 생기도록 밀가루를 조금 넣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반죽을 한다. 그러면 일단 녹두빈대떡을 부쳐먹기 위한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녹두빈대떡은 한 번에 많이 만들어 냉동에 얼려놓고 그 때 그 때 꺼내서 데워먹으면 그야말로 기가 막힌 별미중의 별미가 된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시장기를 덜어 줄 더 없이 좋은 요기거리이자 건강식이다.

당장 차를 몰고 테스코로 달려가서 최권사님댁에서 봤던 기억을 더듬어 녹두봉투를 찾았더니 낯설지 않은 초록색 포장이 눈에 들어온다.

 ‘NATCO-Green Mung Dal’ 2.99파운드(6천원). 거의 밀가루와 같은 수준의 헐값이다. 녹두 한 봉지와 갈아놓은 돼지고기 두 팩을 사서 돌아왔다.
녹두를 서너 시간 물에 불렸더니 녹색껍질이 벗겨지고 뽀얀 속살이 드러난다. 물에 불어 벗겨진 껍질과 알맹이를 분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정성껏 껍질을 골라내고 믹서에 갈았다. 그리고 신김치를 잔뜩 썰어넣고 갈아놓은 돼지고기를 넣었다. 밀가루도 잊지 않았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지만 그 때까지도 아내는 퇴근 전이었다.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준비된 반죽을 얹어 적당한 크기로 부쳤더니 제법 최권사님의 빈대떡을 닮은 꼴이 되었다.

 

아들녀석의 장난끼 가득한 눈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진다. 평소에 보아왔던 내 음식솜씨를 불신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음식을 만드는 공정과정에서 뭔가 익숙하지 않은 어설픈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최초의 녹두빈대떡 한 장이 완성되었다. 약간의 식초와 고추가루를 넣은 간장과 함께 접시에 담은 빈대떡을 아들녀석에게 주었더니 한 점을 입에 베어 물고 오물거리다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운다.

 “아빠~ 너무 맛있어”
퇴근한 아내도 녹두빈대떡이 맛있다며 깔깔 웃어댔다.
신기한 일이다.
녹두빈대떡을 며칠 먹었더니 혈당이 정상수치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6.8까지 올라갔던 공복혈당이 초기당뇨의 경계선인 5.3을 훨씬 밑도는 4.4까지 떨어졌다.

녹두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 놀랄 일이었다. 신김치 때문에 얻게 된 뜻 밖의 결과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뜻 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著者는 뜻 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때문에 달라진 뜻 밖의 인생을 ‘신김치를 잔뜩 넣은 녹두빈대떡’처럼 신기하게 생각하며 글을 시작했다.

“하나님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뭐 그런 이야기다.
사실 나는 하나님이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읽다 말았다. 솔직히 내용은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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