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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있을 때 잘해

hherald 2010.07.17 17:56 조회 수 : 1364

‘딩동~’소포가 배달되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잠옷을 입은 채로 거실 책상에 앉아 아침큐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이 울리자마자 바로 문을 열 수 있었다. 문 앞에 장승처럼 서 있었던 사람은 뜻 밖에도 옆집에 사는 마크였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마크의 굳은 표정에서 불과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는 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웬일이냐?”고 내가 묻기도 전에 마크는 굳은 표정으로 “너무나도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미안하다”며 “마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마크의 손가락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더니 길가에 마샤가 쓰러져있었다. 마샤는 아들녀석의 친구이자 보물이었다.

 

쪼들리는 유학생활이 무서워서 아이를 하나만 낳은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 인생의 큰 실수였다. 부모를 제외한 혈육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아들녀석의 영국생활은 그야말로 외로움 그 자체였다. 솔리튜드니 뭐니 하는 그런 사치스런 철학적 의미부여 따위는 내 실수를 돌이킬 아무런 해법이 되지 않는다. 핵가족 이민 1.5세대 아이의 현실은, 부모에게 야단을 맞고 나면 서러운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는 텅 빈 방뿐이었다. 빈 방에 처박히면 ‘세상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물론 그런 일상 가운데 위로가 되는 컴퓨터도 있고 PS3도 있지만 아이는 체온이 없는 기계에 만족하지 못했다.

 

“엄마... 동생을 낳아주면 안돼?”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아이는 아내에게 동생을 낳아달라고 졸랐다. 물론 중학교를 들어가서도 그랬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팔자에 동생 가질 복은 없나 보다’ 깨닫고 득도한 놈처럼 더 이상 동생타령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현실을 초월한 홀로서기의 결단은 결코 아니었다.

 

하루는 아이가 친구 집을 다녀오더니 똑 같은 강아지를 한 마리 사달라며 앓아 누웠다. 인터넷에 들어가 도대체 어떤 개를 키우자는 것인지 한 번 확인이나 해보자고 그랬더니 세상에... 다 자라면 말만한 로트와일러를 기르자는 것이었다. 차라리 애를 하나 더 낳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개는 안돼”
“왜 안 되는데요?”
“개는...” 갑자기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려니까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질 않았다. “개는 똥 오줌을 못 가리잖아” 궁여지책으로 대답을 해 놓고는 제법 그럴듯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럼 고양이를 기르면 되잖아요. 친구네 고양이들은 다 똥오줌을 가리던데...”
“고양이도 안돼”
“고양이는 왜 안 되는데요?”
“아빠는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렇게 밀고 당기기를 2년. 결국 2년 만에 아이의 소원대로 고양이를 한 마리 사주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 순간, 고양이보다는 개를 기르는 것이 낫겠다 싶었지만 똥오줌을 거의 100% 가리는 고양이 쪽으로 다시 마음을 굳혔다. 이왕 기르기로 맘을 먹은 이상 보기 좋고 혈통 좋은 놈을 구입하기로 했다. 아이가 맘에 든다는 종자는 오렌지 색깔의 눈과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회색털을 가진 ‘브리티시 쇼트헤어’ 였다.
마샤는 첫 번째 암고양이 ‘미씨’가 외롭겠다며 짝을 지어주기 위해 두 번째로 구입한 브리티시 쇼트헤어 수컷이다. 15개월 된 놈을 전문 브리더에게 구입했는데, 전람회에서 1등을 여러 번 한 상력도 있고 B.O.B-Best of Breed 타이틀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암고양이 미씨와는 달리 강아지처럼 사람을 잘 따르는 별난 고양이였다. 내가 목사님들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펍을 가면 그곳까지 따라와 몸을 비벼대고, 침대에서 아들녀석과 함께 잠을 자는 정말 사랑스럽고 잘 생긴 고양이였다.

 

고양이를 세 마리나 기르고 있는 옆집 마크는 평생에 마샤처럼 잘 생기고 성격 좋은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며 마샤를 예뻐했었다. 하루는 자기집 마당 큰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있는 마샤를 사진에 담아 CD로 구워 아들녀석에게 건네주었다. 결국 그 사진들이 마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줄 마지막 사진이 된 셈이다. 집 마당 사과나무 옆에 마샤를 묻어주며 울컥하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지만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이 콧물과 범벅이 된다. 아들녀석은 학교를 가지 못하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사람은 참 어리석다. 갑자기 잃고 난 후에야 겨우 잃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일상이 되어버린 소중한 것들은 결코 내가 정한 시간에 내 곁을 떠나가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시위라도 하듯,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시간에 갑자기 내 곁을 떠나 사람을 허망하게 만든다.

 

“있을 때 잘해”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있을 땐 그냥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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