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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아내예찬

hherald 2010.07.15 15:00 조회 수 : 1411

고 3이 따로 없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 늦게 돌아와서 밤 늦게까지 공부와 씨름한다. 공부하는 방을 슬며시 들여다보면 간혹 밤 늦게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마다 그냥 묻지 않고 아내에게 녹차를 한 잔 끓여준다.  

 

아내는 영국에 오기 전부터 ‘골드스미스-런던대학’에서 ‘예술사 History of Art’를 공부하고 싶어했다.  한심하고 무심한 목사남편 뒷바라지에 치여 그 꿈을 접고 살다가, 십 수년이 지난 후에 겨우 시작하게 된 공부가 워릭대학 MBA였다. 예술사藝術史에 대한 미련은 이미 오래 전에 묻어버린 채 정신 없이 직장을 다니다가 어느 순간 자기확신을 위해 선택한 공부였다.  워릭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 그 동안 없는 돈에 사 모았던 화집들을 책꽂이에서 다 꺼내 박스에 담아 창고에 넣는 냉정함을 보였지만 그래도 아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고흐 Vincent Van Gogh의 그림을 사랑하던 여자였다.

 

먹고 사는 문제로 스코틀랜드에서 버밍햄으로 밀려 밀려,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런던에 기어들어 올 때 우리가 가진 돈은 고작 180파운드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내셔널갤러리로 달려가 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며 감격했던 여자였다.
나를 만나 결혼 한 것이 ‘뭐 그다지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며 ‘측백나무가 있는 밀밭 Wheat Field with Cypresses’ 앞에서 환하게 웃던 얼굴이 내 마음에 판화처럼 새겨졌다.

 

그 날 이후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와의 전쟁... 온갖 사람들과의 어이없는 전쟁... 신앙과 도그마 사이에서 발생하는 애매한 함수관계와의 전쟁...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과의 전쟁...

 

그 무렵 내셔널갤러리 옆으로 직장을 다니던 아내는 힘들 때마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측백나무가 있는 밀밭’으로 달려가, 자신보다 더한 인생의 전쟁을 치뤘던 고흐를 동무 삼아 위로를 받았다. 내셔널갤러리에 걸려있는 고흐의 그림들은 당시 프랑스 2류 화가들의 그림 값 20분의 1에도 팔리지 않았던 것들이다.
고흐 스스로 가장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측백나무가 있는 밀밭’ 조차도 고흐 자신의 생활비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던 작품이다.

 

고흐의 생애를 읽어보면 그의 삶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먹고 사는 문제와의 전쟁. 고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의 전쟁. 화가가 되기 전 탄광촌에서 전도사로 살면서 경험했던 신앙과 도그마 사이의 전쟁.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과의 전쟁.

 

고흐는 자신의 상한 자존심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던 ‘가셰 박사 Dr. Gachet’ 의 초상화를 두 개 그려 그 중의 하나를 가셰 박사에게 선물로 건네 줬다. 1990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무려 8250만 달러(한화 약 940억원)에 낙찰되어 팔려나간 작품이 바로 그 그림이었다. 그야말로 어이없고 황당한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셰 박사는 피사로와 세잔느 같은 당대의 대가들과 친분이 있었던 미술애호가였다. 그런 가셰 박사가 그 초상화의 가치와 깊이를 일찍 알아봤다면, 고흐를 사랑했던 자신의 딸을 고흐와 결혼하도록 내버려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생각이 아니라 가셰 박사의 딸 마그리뜨가 자기 아버지에게 했던 이야기다. 아마 그랬다면 고흐의 인생이 달라지고 현대미술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생은 그런 것이다.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시대와 시간마저도 자신의 가치를 밝혀주는 데는 인색한 분위기다. 더구나 어줍지 않은 것들까지 ‘거동擧動에 망아지새끼 따라다니듯 한다’고 용케도 어미 말을 따라 임금님의 행차 길에 올라, 망아지주제에 뜻도 제대로 모르는 용비어천가를 목놓아 부르는 눈꼴사나운 행보를 보게 되는 것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아내는 언제나 담담하다.
세상은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전쟁 같은 삶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밟아대도 망가지지 않는 자신을 존중하며 사는 것이라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여자.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에게 책을 읽히고, 신문The Guardian을 읽히고, 거짓으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성경을 읽히는 여자다. 그리고 못난 남편 때문에 속 터져 울고 싶을 때는 눈물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더 울지 못할 때까지, 밤새 울다 지치도록 자신을 위로할 줄도 아는 여자이다. 그래도 풀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면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밥을 굶는 여자다.

 

아마 내가 아내를 닮았다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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