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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쿠키 이야기

hherald 2010.07.17 20:27 조회 수 : 14053

어느 공항에서 젊은 여자가 자신이 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그 동안 읽을 책을 한 권 사면서 맛있게 보이는 쿠키도 한 봉지를 샀다. 여자는 공항대합실에서 한가하고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은 후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여자가 쿠키를 내려놓은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가방에서 잡지를 꺼내 펼쳤다.
여자는 별 생각 없이 쿠키봉투를 열고 첫 번째 쿠키를 꺼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남자도 태연하게 자기의 것인 양, 묻지도 않고 쿠키를 하나 집어 든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한 대 때려 줄까 보다”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가 쿠키를 한 개씩 꺼내 먹을 때마다 남자도 똑같이 쿠키를 집어 먹는 것이었다. 그 때마다 너무 화가 났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마침내 쿠키가 하나 남았다.
“도대체 이 무뢰한無賴漢이 어떻게 하는가 두고 봐야지...” 생각을 하는 순간, 남자가 마지막 남은 쿠키를 집어 들더니 반으로 쪼개 절반을 여자에게 건넨다. 정말 어이없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경멸하듯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후에 가방과 책을 들고 탑승구를 향해 걸어갔다.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을 때 여자는 안경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여자가 거의 들리지 않을 신음에 가까운 외마디 탄성을 속으로 삼키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문다. 공항에서 샀던 쿠키 한 봉지가 가방에 그대로 들어있는 것이었다. 정신 없는 공항에서, 쿠키를 사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가방에 넣었던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그 남자가 무뢰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뢰한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너무 망신스럽고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는 자기의 쿠키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와 나눠먹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가 자기의 쿠키를 먹고 있다고 오해하면서 경멸의 시선까지 보냈으니... 쿠키를 나눠주던 그 남자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러나 이젠 남자에게 사과도 할 수도 없고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비행기는 이미 공항을 떠나 높은 하늘을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내 손을 떠나 버린 것...
내 입을 떠나 버린 말...
잃어버린 기회...
그리고 흘러가버린 시간...

공항에서 일어난 일쯤은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망신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꼭 공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도 태연하게 남의 쿠키를 집어 먹으며 너무나도 당당하게 사람들을 무뢰한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대상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난 후에 느껴질 부끄러움이나 자책감이 덜 할 텐데 문제는 흔히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결혼생활이 그렇게 시작되는 웃지 못 할 갈등의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태연하고 뻔뻔하게 내 쿠키를 집어먹고 있는 남자.
너무나도 태연하고 뻔뻔하게 내 쿠키를 집어먹고 있는 여자.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무뢰한을 만나서 살고 있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을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내 아내와 내가 그런 억울한 사연을 서로 20년이나 참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전혀 뜻밖의 쿠키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그 때는 곱고 아름답던 아내의 인생이 다 흘러간 후가 될지도 모른다. 아내 역시 그럴 것이다. 지금은 너무나도 태연하고 뻔뻔하게 쿠키를 집어먹고 사는 남자, 더 할 수 없는 무뢰한과 살고 있다고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쿠키를 바라보게 수도 있다. 아마도 그 때는 굵고 깊게 주름졌던 내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아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결혼은 내 쿠키를 그 무뢰한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눠먹으며, 마지막 남은 것까지 반을 쪼개 상대방에게 건네줄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겨우 행복할 수 있는 갈등의 드라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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