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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허물벗기

hherald 2010.08.09 18:09 조회 수 : 11135

 

뱀은 허물을 벗는다. 허물을 벗어야 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내 옷은 늘 작아졌다. 그것이 그 시절 내 생각의 한계였다. 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옷이 작아진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한 어느 날,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질문을 했다.
“엄마... 왜 옷은 맨날 작아지는 거야?”
옷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라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옷이 줄어드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옷은 작아지지 않았다. 그 때부터 내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그 후로는 옷이 낡기 시작했다.

뱀의 허물은 늘 작아진다. 옷과 같이 질긴 뱀의 비늘껍질은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더 이상 맞지 않는 작은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허물을 벗지 못하면 단단하게 말라 굳어지는 껍질 안에 갇혀 서서히 말라 죽게 된다.

암(癌)처럼 치명적인 병도 없지만 뱀에게는 암보다 더 한 것이 허물을 벗지 못하는 병이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병에 걸리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고집스럽게 나이든 사람들처럼, 내 생각이 옳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내 생각은 어쩌면 그렇게도 완벽하고 빈틈이 없는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일 틈이 없었다. 돌아보니 바로 그 때가 굳어지고 작아지기 시작한 내 허물을 벗어야 할 시점이었다. 그 때 벗지 못한 생각과 관념의 껍질은 점점 더 메말라 단단하게 굳어지기 시작했고 ‘내가 옳다는 생각’은 더 이상 벗어나기 힘든 감옥처럼 나를 가둬버렸다. 성장은 이미 그 때 끝나버린 것이다.
이민생활은 마치 허물을 벗지 못하는 병과 같다. 그래서 허물을 벗지 못한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모여 산다.

매미도 허물을 벗는다.
그러나 살기 위해 허물을 벗는 것은 아니다. 매미는 허물을 벗어야 비로소 매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미는 가을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 10개월이 지나면 알에서 꿈틀거리는 굼벵이가 부화된다. 굼벵이는 땅속으로 들어가 7년쯤을 살면서 네 번의 허물을 벗는다. 허물을 벗을 때마다 점점 매미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름이 되면 땅 위로 올라와 나무 위에서 날개가 달린 매미가 되기 위한 마지막 허물벗기를 한다.
그렇게 태어난 매미는 겨우 20일 짧은 시간을 원 없이 노래하다 죽는다.

벗어놓은 허물처럼 흉측 맞은 것도 없다. 허물을 벗지 못하면 그 모양 그 꼴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좀처럼 허물을 벗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허물을 벗지 못한 자화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16살 먹은 아들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빠... 좀 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빠는 목사님이잖아요”
그 한마디로 아들놈은 내게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한 셈이었다.

오래 전에 내가 꿈꾸던 인생은, 하루하루를 사는 동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다. 굼벵이처럼 서러운 바닥 인생을 살더라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허물벗기를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그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허물벗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스스로 허물벗기를 포기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때 늦은 허물벗기를 시작했다.
나이 50에 허물을 벗지 못한 자화상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6살짜리 아들놈에게 들켜버린 허접스럽고 낡아빠진 나의 고정관념이 너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너무도 단단하게 굳어버린 생각과 관념의 껍질을 빠져 나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들놈에게 꼭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빠... 아빠는 목사님이라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나는...”

내가 벗어놓은 흉측 맞은 허물을 보기 전에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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