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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넘지 말아야 할 선 線

hherald 2010.07.17 20:29 조회 수 : 11600

벌써 사흘째 여우 한 마리가 집안까지 들어온다.

사흘 전에는 Conservatory와 연결된 부엌과 거실을 지나 내 서재까지 침범을 했다. 아마도 우리집 새끼고양이 앰버를 사냥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더운 날, 문을 닫아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퇴근한 아내는 더위를 피해 저녁바람이 솔솔드는 Conservatory에 앉아 있었다.

학교에 제출할 에세이 데드라인을 맞추고 있는 중이다.

늦바람이 들어 시작한 공부라 힘들어하면서도 워릭(Warwick) 대학 MBA라는 자부심으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다.
노트북 앞에서 석고처럼 굳어 코를 빠뜨리고 앉아 있는 아내를 먼 발치에서 여우 한 마리가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드디어 여우가 몸을 털고 일어선다.

조심스럽게 우리집을 향해 걸어오더니 아내와 불과 1m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Conservatory를 통과한다.

동영상으로 찍어서 올리면 영락없이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 될 상황이다.
여우가 부엌을 지나 거실까지 들어왔다. 엄마고양이 미씨는 안락의자 등받이에 올라앉아, 여우를 태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우도 발톱을 드러내면 만만치 않게 사나울 엄마고양이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정말 황당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선진국의 대도시 런던의 주택가에서 어떻게 이런 장면이 연출될 수 있는 것인지... 여우사냥이 법적으로 금지된 후에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여우사냥이 중단되고 나니 가정집이 영리한 여우들의 사냥터가 된 셈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500ml 물병을 거꾸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도망치는 여우를 향해 힘껏 던졌더니 아쉽게도 머리통을 살짝 빗나간다.

아내는 그때서야 여우가 자기를 무시하고 거실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이없는 웃음을 웃는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도망치던 여우가 나를 비웃듯이 다시 돌아와 뒷마당을 어슬렁거린다.
‘RSPCA’의 동물보호라는 명분도 좋지만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하다.
얼마 전에 여우 한 마리가 런던근교의 가정 집을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

이층까지 올라간 여우가 어린아이를 마구 물어 뜯어 피투성이로 만든 사건이 보도되면서, 금지된 여우사냥의 문제점이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우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을 넘은 것이다. 이제 여우사냥이 다시 시작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이 있다.
자동차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고, 분단국가의 병사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있다.

남녀가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있고, 생각 있는 사람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있다.

 자녀가 넘지 말아야 할 선, 부모가 넘지 말아야 할 선, 아내가 넘지 말아야 하고 남편이 넘지 말아야 할 선 그리고 너와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진 그 선들은 정말 일일이 나열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그 숫자와 상관없이 분명한 것은, 모두가 다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들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얼터너티브 록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의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리드보컬 ‘크리스 마틴’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불렀던 ‘인 마이 플레이스’의 첫 소절이다.
“In my place, in my place were lines that I couldn’t change... 여기 내가 있는 이 곳에는 내 힘으론 바꿀 수 없는 선들이 그어져 있었어요”
가사의 내용대로 그 선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 선은 어떤 목적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은 점점 선을 넘는 자들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크리스 마틴의 ‘lines that I couldn’t change... 내 힘으론 바꿀 수 없는 선들’의 고백은 더 이상 우리 앞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그 선들은 ‘넘어서기 위해 존재하는 용기의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평범한 드라마의 소재가 되어버린 불륜이 그렇고 결과론에 치중한 하극상下剋上이 그렇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어정쩡하게 넘으면 불륜이 되고 하극상이 되지만, 성공적으로 넘으면 사랑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이 우리의 새로운 ‘상식과 윤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불륜도 불륜이지만 하극상은 거실에서 마주친 여우보다 더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이 된다.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여우가 드디어 몸을 털고 일어서는 것처럼,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려는 자들로 넘쳐나는 것이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참 별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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