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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사 에세이

고정관념 固定觀念

hherald 2010.11.03 13:40 조회 수 : 10705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유학을 시작했던 91년부터 몇 년간 잡지사 파트타임 특파원으로 일을 했었다. 말이 특파원이지 겨우 쥐꼬리만한 계약금을 손에 쥐어주고 거창한 타이틀만 달아 준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일을 통해서 제법 큰 돈이 되는 일거리들이 연결되곤 했기 때문에 가난한 유학생이 먹고 살자고 했던 일이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장모님은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예수 믿는 전도사에게 딸을 주는 일은 없을 거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는 그 선언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사람처럼 완강하게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하던 끝에 머리를 쥐어 짜 얻은 결혼작전이 바로 ‘영국 행行’이었다.
“전도사로 안 된다면 교수가 되는 수 밖에...”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 짓이었다. 세상 인구의 절반이 여자인데 왜 하필이면 ‘저 여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영국우표를 붙인 항공우편의 위력은 대단했다. 유학이 그리 흔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교수가 되겠다’는 공약과 함께 딸의 찬란한 미래를 약속했던 그럴싸한 이야기는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비싼 요금 때문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장모님께 국제전화를 걸었더니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자”며 한 걸음 물러나셨다. 결국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아내와 나의 영국생활이었다.

 

그 때는 잡지사 일을 폼이나 재미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는 아내의 푸념처럼 ‘어쩌다 눈이 멀어서...’ 나를 따라 영국까지 건너온 사람인데, 그런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의 영국생활은 엉겁결에 농기구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게 된 농부의 무모함과 절박함 그 자체였다. 빈손 들고 시작했던 에딘버러에서의 유학생활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잡지사 일은 영국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사진을 찍어, 매달 내 이름으로 네 페이지짜리 특집기사를 연재하는 것이었다.

93년 1월에 한국으로 기사를 송고하고 났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가 발생했다. 기사에 붙여 보냈던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버밍햄 남쪽 에지바스톤이라는 동네공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겨울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영국의 푸른 잔디가 편집장의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잡지사의 항의에 여러 차례나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가며 “영국잔디는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고 목이 쉬도록 설명했지만, 사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이야 영국을 다녀간 사람들이 지천이라 겨울에도 죽지 않는 서양잔디가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은 달랐다. 겨울잔디는 누가 뭐래도 누렇게 말라 죽는 것이 상식이었다.

 

지금은 값싼 전화카드가 많아서 한국으로 통화를 하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지만, 20년 전에는 1분에 1파운드 10펜스씩이나 하는 엄청난 요금 때문에 한국으로 전화를 걸기가 쉽지 않았다. 잡지사 일 때문에 평소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전화요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 속상해하던 아내의 표정이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연한 기회에 잡지사 편집장이 영국으로 출장을 나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던 겨울잔디의 의혹이 풀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의 겨울을 경험한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잔디는 얼어 죽는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固定觀念이 깨지게 된다.

고정관념은 한마디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의 관념’이다. 좀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사용할 줄 몰라 오로지 ‘기본모드 밖에 모르는 관념’이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녹슨 관념’이다. 더구나 아랫사람을 거느리기 시작하면서 어깨에 힘이라도 들어가면, 그것은 마치 윤활유를 공급하지 않아서 망가진 '고장 난 관념'이 된다.

 

자존심은 무너질 때 가슴도 함께 무너져서 많이 아프지만, 고정관념은 깨질 때 전혀 아프지 않다. 고정관념이 깨질 때는 오히려 막혔던 코가 뚫리는 것처럼 시원하고, 가려졌던 시야가 트이는 것처럼 경이로운 경험이 된다. 

 

“어...!!”
이것이 고정관념이 깨질 때 들리는 오묘한 신음소리다. 그 신음소리가 하나 둘 쌓여 사람의 내공內攻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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