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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한 여성의 하이힐 한 켤레가 영국 여성들의 인권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은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해 12월 한 용역공급 업체가 ‘프라이스 워터하우스 쿠퍼스’라는 세계적 회계법인의 사옥 안내소 안내원으로 임시 파견한 여직원 한 명이 하이힐이 아닌 굽이 낮은 단화를 신고 출근했다. 용역회사 담당자는 즉각 나가서 하이힐을 사서 신고오라고 요구했는데 여직원은 이를 거부했다. 담당자는 즉시 여직원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당일 수당 역시 지불하지 않았다. 니콜라 토프라(27)란 이름의 이 여성은 단역 배우 생활을 하면서 틈날 때마다 아르바이트로 용역업체의 일을 해왔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 니콜라 토프라는 즉각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연을 올리면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내용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업무와 관련이 없는 복장, 특히 하이힐 착용을 강요하지 말라는 법 청원 서명운동이었다. 서명운동은 처음엔 주목받지 못하다가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결국 5개월 만에 14만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는 영국 사회의 반향을 일으켰고 BBC를 비롯해 주요 언론들도 앞다퉈 소식을 전하면서 전국적 화제가 됐다. 
 
관련 법안 제정 혹은 개정 절차 준비 중
 
급기야 정치권에서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 여성의원은 “우리들의 직업사회 내부에 이런 명백한 성차별이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며 시대착오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영국 법에 의하면, 청원을 위한 서명운동에 동참한 인원이 1만 명을 넘으면 정부에서 해당 사안을 공식적으로 다뤄야 하고 의회는 입법을 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법에 따라 관련 법안 제정 혹은 개정을 위한 절차가 준비되고 있다.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동안 영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각종 성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SNS에는 하이힐을 신고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한 나머지 스타킹을 비롯해 신발 안에 피가 흥건히 고인 사진이 올라오는가 하면, 임신 중이거나 허리를 다쳤는데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신어야 했던 고통 등을 호소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하이힐로 대표되는 직장여성들의 성차별 문제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왔다.
 
이번 사건은 영국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일이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영국인들은 ‘아직도 이런 전근대적인 관행이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정말 놀랍고 부끄럽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여성인권엔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영국인들은 바로 자신의 나라에서 후진국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놀라고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듯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전근대적 관행이 전혀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국 노동 관계법에는 직원이 입고 출근한 옷이 회사 복무규정에 어긋난다고 고용주가 판단할 경우 시정을 요구할 수 있고, 적절한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를 시정하지 않으면 해당 직원을 해고할 수 있다는 독소조항이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언론들이 법적 문제를 지적하기 전까진 대다수가 이 독소조항을 몰랐다. 
 
물론 이 법은 기본적으로 성차별을 금지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복장 규정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모두에게 적용된다. 예를 들면 여직원에게는 하이힐을 신으라고 하는 것처럼, 남자직원에게도 넥타이를 매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여성에게만 하이힐을 신으라고 강요하면 성차별이지만, 남자직원에게도 비슷한 의미의 복장 규정을 두고 있다면 성차별이 아니라고 보는 셈이다. 또한 ‘섹시하다’는 이유에서 하이힐을 착용할 것을 요구하면 성차별이지만, 정장의 일부로 여겨 손님들에 대한 예의 혹은 전통 관습 등의 이유를 대면 여직원은 여기에 따라야 한다. 남자직원의 넥타이도 마찬가지다. 직원이 업무를 하면서 고객들을 상대할 때 직원은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라 업무나 회사의 이미지에 맞는 복장과 외모를 준수해야 하고, 그러지 못할 때는 경고나 처벌을 받고 해고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기준이 상당히 자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업무나 회사의 이미지에 맞는 복장과 외모 준수’의 규정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정하고, 보편화된 일정한 기준이나 사회적인 합의가 없다. 

영국 고용법, 논쟁의 여지 많아
 
이보다 앞서 영국 사회의 성차별 사건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됐던 것은 12세 남학생에 의해서였다. 2011년 5월 영국 케임브리지 시골 마을 학교에서 복장 규정과 성차별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12살 남학생이 학교에서 반바지를 못 입게 하자 여학생 교복인 스커트를 입고 등교를 해서 화제와 함께 큰 논란이 됐었다. 여학생은 스커트를 입는데 남학생이라고 못 입을 이유가 없다는 남학생들의 주장에 학교 측은 허를 찔렸다. 남학생의 반바지 착용을 금지했던 교장은 순순히 ‘스커트를 입은 남학생의 행동은 학교 교복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고 인정했다. ‘여학생은 더운 여름에 시원한 치마를 입는데 남학생은 왜 긴 바지만 입어야 하느냐’는 불만을, 항의 서명이나 시위 같은 물리적인 방법이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성차별 논리를 끌어들여 12살 학생이 교장을 멋지게 이긴 셈이다. 이 학교 수학교사인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 한 의사표시 행동에 대해 “바로 그것이 학교가 권장하는 바가 아니냐? 내 아들은 자신이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긴 것뿐이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출판사를 가진 아버지도 아들의 지극히 창조적인 생각에 놀라움과 뿌듯함을 표하면서도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을 걱정했는데 모두들 동조해줘서 안심했다고 했다. 
 
영국의 법률 전문가들은 영국 고용법에 이번 하이힐 사건이 많은 논쟁의 여지를 남겨놓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직장에서의 복장 규정이 어떻게 해야 합법이고 어떻게 하면 불법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가 아직 영국 사회에서 없었다는 점과 함께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이힐 착용과 함께 화장하고 출근하라고 요구할 수 있고, 이를 어기면 처벌이 허용되는 현재의 고용법은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목소리가 이번 사건으로 힘을 얻어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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