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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지난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윤석열 대통령이 3박4일 일정으로 영국을 찾았다. 국왕 찰스 3세 초청 국빈 방문이었다. 영국 국왕은 1년에 외국 국가 수반 두 명만 초청하는데, 윤 대통령은 찰스 3세가 왕이 된 후 초청한 첫 국빈이었다. 영국과의 수교 140주년 기념일이 11월 26일이라 시기를 맞춘 듯했다.
 
사실 영국과 한국은 역사상 이해관계가 특별히 얽힌 접점이 많지 않은 사이다. 그나마 있었던 접점은 모두 불행한 이유로 생긴 사건들이었다. 1883년 수교 이후 140년 동안 영국이 6·25에 참전한 것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당시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내 1000여명이 전사하고 2000여명이 전상을 입는 희생을 치렀다.
 
1885년 4월 15일 영국 해군이 남해의 거문도를 무단 점거한 사건도 있었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점거한 거문도에서 1887년 2월 27일 철수할 때까지 영국 해군은 거의 2년간 무단으로 머물렀다. 한심한 일은 당시 조선 정부는 자신의 영토가 외국군에 의해 점거되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급기야 답답했던 일본 정부가 영국한테 점거 사실을 조선에 통보했느냐고 물었을 때에서야 ‘아차!’ 할 정도로 영국에 있어 조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지못해 영국 북경대사관이 한성의 영국 영사관에게 훈령을 내려 조선 정부에 ‘예방 차원의 선점 점령(preventive, pre-emptive occupation)’이라는 해괴망측한 이유를 일방적으로 통보할 정도였다. 사건 딱 1년 전인 1884년 4월 4일 영국 총영사관이 한성에 개설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를 한 셈이다.
 
 
 
한반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한 이유
 
그러고는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도 불행한 일과 연관이 있는데, 이때는 한국이 당사자가 아니었다. 일본과 영국 사이의 일이었다. 일본이 2차대전 중 영국군 포로 1000여명을 한반도에 수용소를 만들어 수용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 지역과 동남아를 파죽지세로 점령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영국, 호주, 미국 등 19만명의 연합군 포로들을 일본 열도 내 200군데를 비롯해 동남아 여기저기에 수용했다. 일본은 한반도에도 수용소 3곳을 설치했는데, 서울 용산의 케이조(Keijo·서울의 일제강점기 때 이름인 경성(京城)의 영어식 발음) 수용소, 인천의 진센(Jinsen·인천의 영어식 발음) 수용소, 그리고 흥남의 코난(Konan) 수용소 등이었다.
 
일본이 한반도에 수용소를 설치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1942년 2월 이타가키 세이시로 조선관구 군사령관의 요청이 있었다. 세이시로는 영국군과 미군 포로를 조선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서양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환상을 깨고 동시에 일본이 승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서 1942년 9월 싱가포르에서 굳이 1000여명의 포로를 한반도로 싣고 왔다. 특히 이들을 한곳에 모아 놓지 않고 전국에 수용함으로써 서양인이 ‘귀신, 짐승 같다’고 선전하던 ‘귀축미영(鬼畜美英)’의 본보기로 삼았다. 포로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해서 서양인들에 대한 환상을 깨고,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일본은 부산항에 내린 포로들을 부산 시내에서 행진시켰다. 다음날 기차를 태워 서울로 데려와서도 다시 행진하게 만들어 서울 시민들에게도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포로들이 싱가포르에서 부산항까지 오는 동안 설사와 각기병에 시달려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포로 한 명은 당시 싱가포르에서 오던 수송선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인간이 지낼 수 있는 조건은 물론 아니고 동물마저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서양에 대한 환상 깨뜨리려 포로들 행진시켜
 
행진이 수 주 동안 계속되는 과정에서 급기야 16명의 포로가 사망했다. 문자 그대로 패잔병 모습을 한 영국군의 행진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촬영되었고, 이것이 그대로 조선과 일본 언론에 보도되었다. 특히 영국군의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은 일본의 의도에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패전을 했는데도 군인답게 자결하지 않고 포로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려는 영국군의 졸렬한 모습을 보여줘 서양에 대한 조선인들의 환상을 깨려는 의도였다.
 
이런 행진은 일본 전국에서도 행해졌는데 일본에서는 걸핏하면 포로들을 수용소 밖으로 끌고 나와 노역을 시켰다. 포로들로 하여금 거리의 쓰레기통과 도로 배수구를 맨손으로 치우게 했고, 도로를 청소시키기도 했다. 홍콩에서는 가장 천민인 쿨리가 하던 인력거 끌기도 시켰다.
 
일본군의 의도대로 조선과 일본에서는 영국군과 미군 패잔병의 모습을 멸시의 눈으로 보는 여론이 형성됐는데, 그래서인지 일본군은 포로들의 행진을 ‘승리 행진(Victory marches)’이라고 명명했다. 이런 승리 행진은 일본 본토와 조선, 중국 같은 식민지에서만 행해졌다. 중립적인 동남아국가에서는 오히려 포로들을 무사도의 친절로 잘 처우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당시 조선으로 실려 온 영국군 포로는 주로 싱가포르 함락에서 포로가 된 군인들이었다. 싱가포르 함락은 처칠의 말처럼 ‘영국 역사상 최악의, 그리고 최대의 항복(the worst disaster and largest in British history)’이었다. 숫자상으로 일본군의 거의 3배인 8만5000명의 영국군이 불과 3만5000명밖에 되지 않는 일본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단 1주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1942년 2월 8일 시작한 싱가포르 침공 전투를 그해 2월 15일 끝냈다. 당시까지 대영제국의 후광을 누리고 있던 무적의 영국군이 일본의 기습에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 셈이다.
 
당시 일본군의 전술은 영국군이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개전 첫날부터 이어진 일본 공군의 11차례에 걸친 정밀 공습으로 이미 영국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거기다가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정글을 ‘자전거 급습 작전(bicycle blitzkrieg)’으로 단기간에 돌파해 미처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영국군을 경악시켰다.
 
당시 영국군과 호주군은 국경에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집중적으로 쳐들어 오는 일본군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싱가포르 주둔 영국군의 장비는 바다로 쳐들어 올 적군에 대한 방어무기에만 집중되어 있는 형편이었고, 말레이시아 정글을 통해 들어오는 적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었다. 정글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영국군은 정글을 뚫고 누가 들어오겠는가 하는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허술한 작전계획, 정글 전투 훈련 전무, 정보부족, 저하된 사기, 지휘계통의 문제점, 공군 전투력의 절대 약세 등으로 영국군은 숫자만 많을 뿐 도저히 최정예부대 일본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결국 9000명의 영국군과 인도군, 호주군 등이 전사하고 도합 13만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이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많이 포로가 되긴 처음이었다. 싱가포르 함락은 영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다.
 
당시 영국군 아서 퍼시벌 육군중장이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은 영국 흑역사의 하나로 유명하다.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퍼시벌 중장도 결국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 장교들과 병사들은 동남아 각지에 엉성하게 건설된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었다. 싱가포르 창기수용소에 제일 많이 수용되었는데, 이곳 포로들은 415㎞의 타이-버마 철도, 일명 ‘죽음의 철도(Thailand-Burma ‘Death Railway)’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1942년과 1945년 사이에 6만여명의 영국군, 호주군, 네덜란드군이 이 철도 건설 강제 노역을 하다 1만6000여명이 사망했다. 희대의 명작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이 철도 건설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
 
 
싱가포르에서 1000여명이 한반도로 실려와
 
1942년 한반도에 온 포로들은 바로 이 창기 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포로들이었다. 당시 영국 및 영연방군 포로 1000여명이 9월 22일 부산에 도착해 500명은 인천에, 나머지 500명은 서울 용산에 수용되었다. 1942년 9월 25일 개설된 용산 포로수용소는 나무 담장이 쳐진 5184㎡ 크기로, 방직공장으로 사용되던 타일 지붕으로 된 4층 건물이었다. 이 건물 2층부터 4층까지가 포로 숙소로 사용되었다. 방에는 칸막이가 쳐져 한 칸에 8명이 잤다. 이 용산 수용소는 현재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신광여자중·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일본이 한반도에 영국군 포로수용소를 만든 두 번째 이유는 자신들의 군사 시설을 보호를 위한 인간 방패로 쓰기 위함이었다. 굳이 수용소를 용산에 설치한 이유도 인근의 용산역 군사 철도 시설을 연합군 공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당시 미군 항공 촬영 자료를 보면 포로수용소의 위치가 정확하게 나온다. 일본군의 의도가 맞은 셈이다. 인천에 위치한 수용소도 부두의 군사 화물 창고 인근이었다. 흥남 수용소도 흥남 비료공장 보호용이었다.
 
당시 포로들에 대한 처우는 용산 수용소가 그나마 제일 나았고, 인천이 그보다 못했으며 흥남 수용소가 제일 나빴다. 이유는 당시 국제적십자사 직원이 멀리 떨어진 흥남 수용소까지 가지 않아서였다. 적십자사 직원이 흥남 수용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던 중 병이 나서 일본인들이 직접 수용소 현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보고서에는 ‘모든 상황이 문제가 없다’고 되어 있다. 해서 흥남 수용소에서는 열악한 상황을 견디다 못한 포로들의 탈출 시도도 잦았다.
 
당시 흥남 수용소 포로들은 카바이드 연료 공장 용광로 작업을 담당했고 질소 비료 공장에서 비료 생산도 도왔다. 그래서 열기와 먼지가 포로들의 호흡기관을 망가뜨렸다. 흥남 수용소는 특히 겨울에 추위로 인해 고통이 심했다. 당시 포로들에게는 영하의 기온을 견딜 의복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한반도의 영국군 포로들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 받을 수도 있었다. 영국의 가족들이 포로들에게 편지를 보내면 세계를 거의 한 바퀴 돌아서 들어왔다. 런던~리스본~마르세유~제네바~부다페스트~이스탄불~소련(바투미~사바토르)~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수용소로 배달되는 데 통상 3~4개월이 소요되었다. 어떤 편지는 1942년 11월 24일 보냈는데 무슨 이유인지 14개월 뒤인 1944년 2월 17일에 도착하는 일도 있었다. 아예 편지가 어디선가 사라지고마는 일도 허다했다. 문제는 소련 정부였다. 소련은 일본과 연관되는 것을 싫어해 우편물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편지를 받고 나서야 그전에 보낸 편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가 일본이 정확한 포로명단을 제공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영국에 있는 가족들이 자식이나 친척이 어느 수용소에 있는지도 몰랐고 생사여부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전쟁을 벌이면서도 일본과 영국 두 정부 사이에 적어도 포로들이 편지는 주고받을 수 있게 하자는 합의가 이뤄진 것이 다행이었다. 당시 합의에 따르면, 한 장의 종이 앞뒤로 내용을 적고,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분명하게 써야 하고, 1주일에 1장의 편지만 받고 보낼 수 있다는 조건이었다. 편지 안에는 아무것도 넣으면 안 된다는 단서도 달았다.
 
 
 
용산 포로수용소의 생활
 
한반도의 영국군 포로수용소에는 가끔 국제적십자사 직원이 방문해 모든 포로들이 국제협약이 정한 처우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한반도에서의 수용소 생활을 적은 ‘황제의 손님(Guest of an Emperor)’이라는 책을 쓴 아서 크램시는 자신이 수용돼 있는 동안 그런 방문이 세 번 있었다고 쓰고 있다. 수용소 당국은 이런 방문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에 모든 상황을 좋게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특히 용산 수용소는 일본이 포로들을 아주 정당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선전에 사용되는 견본 수용소(show camp)여서 동남아의 다른 수용소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relatively benign)이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일본 고위층이 포로들 처우에 관심을 가질 때도 용산 수용소를 보여줬다. 당시 국제적십자사에서 소포와 소액의 용돈도 포로들에게 보내주었는데 포로들은 그 돈을 수용소 경비원들이 찍어준 사진을 사는 데 사용했다. 이런 사진들이 영국으로 보내져 언론에 보도되면서 나름대로 여론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현재 영국 전쟁박물관에 남아 있는 적십자사 직원의 한반도 수용소 보고서에는 ‘병원 시설이 포로들을 돌볼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의복을 비롯한 비누 등의 생필품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정작 병원에 환자로 있던 포로들은 “적십자사가 보낸 소포가 18개월 동안 1인당 단 하나만 전달되었다”고 증언하는 등 보고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1942년 9월 26일부터 1945년 8월 종전까지 28명의 영국군 포로들이 사망했다는 사실도 사망자 수기 명단에 적혀 있다. 이들은 인천, 서울의 병원과 수용소에서 사망한 걸로 나와 있다. 참고로 동남아 포로수용소에서는 전체 수용자의 25%가 죽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유럽보다 동남아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이 무려 7배가 높았다고 한다.
 
 
 
영국군 포로 1000명 중 절반이 숨져
 
영국군 포로들은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의 글을 많이 남겨 놓았다. 그중에는 영어가 되는 일본군 장교들과의 대화 내용도 있는데, 영국군은 “일본군의 정신세계가 대단히 흥미로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수용소의 일본군은 자신들과 비교해 신체적인 면이나 전쟁 장비에서 월등한 영국군이 도저히 대적이 안 됨을 알고는 다른 면에서 우월감을 충족시키려 했다고 영국군 포로들은 말한다. 예를 들면 자신들이 영국군보다 강한 이유를 무사도(武士道·bushido) 정신에서 찾는 식이다. 또 자신들은 대화혼(大和魂), 즉 일본 정신이 있어 영국군보다 전투 정신이 우월하다고 여기고 실제 그렇게 믿는 일본군들이 많다는 증언도 있다. 영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인적인 이기심이 우선하는 데 반해 자신들은 애국심과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개인보다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면에서 훨씬 우월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믿음은 고위 군인들일수록 더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일본 군인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지 않고 살아서 손을 들고 포로가 되는 것은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수치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군이 충분히 싸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고 포로가 되는 것을 보고는 군인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수치인데도 불구하고 영국군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걸 즐기는 듯 행복하게 지내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영국군을 일본군들은 일종의 성격 파탄자로 보았다. 영국군을 자존심도 없는 동물 같은 인간들로 보아 모질게 대한 것이라고 영국군 포로들은 분석했다.
 
1945년 8월 15일 종전 날 한반도에 있던 영국군 포로들은 모두 551명이었다. 1000여명이 부산에 도착해 결국 반만 살아 남은 셈이다. 사망자 명단도 아직 자료로 남아 있는데, 매장한 장소는 물론 화장해서 분골을 묻은 장소까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영양의 문제, 의료시설 문제 등으로 아까운 청춘이 이국 만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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