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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유럽에서 살다 보면 한국에서 입양온 동포들을 만나게 된다. 대개 좋은 가정을 만나 서양 주류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자랑스러운 청년들이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유럽 교민들은 그들을 만날 때면 항상 미안한 감정이 든다. 한국에서 감싸안지 못하고 내보내야만 했던 우리들의 아픈 역사의 흔적처럼 여겨져 어쩔 수 없이 죄의식에 빠져든다.
   
   영국은 요즘 우리와는 다른 입양 문제 청산에 골몰하고 있다. 영국에는 2차대전 직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미혼모의 사생아를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입양(forced adoption)시킨 흑역사가 있다. 이제 영국은 그 아픈 흑역사를 정면으로 대면하려 하고 있다.
   
   당시 영국은 종교적인 도덕 관념 때문에 미혼모를 중죄인 취급했다. 10대의 임신은 생각할 수도 없는 중범죄였고 미혼모들은 중죄인이었다. 그래서 미혼모들을 ‘모자집(mother and baby homes)’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거의 집단수용소 같은 곳에 수용했다. 주로 해산 전에 주위의 눈이 무서운 가족들에 의해 이곳으로 보내졌다.
   
   
   미혼모 강제수용소 ‘모자집’
   
   모자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생모의 동의도 없이 강제입양 보내졌다. 편모슬하의 결손가정보다는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양육되는 것이 훨씬 더 정의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해산한 산모는 모자집에 장기 수용돼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임금도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다시피 했는데, 그런 고통을 죗값으로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당시 영국에는 150여개의 모자집이 민간 종교 자선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고, 1950년대에서 1970년대 말까지 30년간 25만명의 미혼모들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미혼모들은 모자집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강제입양 보내도 제대로 반대도 못 했다. 혼전 성관계와 임신은 수치스러운 것인데 죄인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분위기였다. 아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도 아무 말 못하고 입양되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내게 입양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절차가 기정사실처럼 진행되었다”는 것이 당시 미혼모들의 증언이다. 어린 여성들을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어 아이들을 강제로 뺏어간 셈이다.
   
   강제입양 피해 미혼모들의 이야기는 2000년대 들어 계속 거론되다가 최근 영국 언론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 기사들은 당시의 실상을 소개하면서 아이를 빼앗긴 미혼모들의 아픈 인생사까지 다룬다. 독자들은 기사를 읽으면서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괜한 죄의식과 함께 미혼모와 사생아들의 힘든 삶에 가슴 아파한다. 그럼에도 영국에서는 그동안 애달픈 모자들을 위한 조치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세기도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공개적인 논의가 이루어져 영국 하원도 지난 6월 10일 역사적인 첫 청문회를 가졌다.
   
   사생아 강제입양은 영국뿐 아니라 캐나다,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연방국가에서도 행해졌다. 이 중 호주 정부는 2013년 제일 먼저 사과했고, 2018년에는 아일랜드 정부도 사과했다. 아일랜드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5000만파운드(750억원)의 보상까지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는 2017년을 비롯해 그전에도 수차례 공식 조사 요구가 있었지만 충분한 정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하면서 문제를 외면해 왔다. 수많은 피해자와 자선단체들은 왜 영국 정부가 이를 외면해 왔는지 의아해한다. 최근에는 영국 언론들도 기사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있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지난 5월 25일 집권 보수당 10선 중진의원이 존슨 총리에게 영국 정부가 이제는 무조건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는 편지를 공개적으로 보냈다. 현재 피해자들의 요구도 일단 정부가 정식 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당시 교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미혼모를 위한 모자집의 횡포와 착취 그리고 입양기관의 비행을 영국 정부가 책임지고 사과하라는 요구이다.
   
   
   아이 뺏기고 강제노역
   
   미혼모 중에서는 자식을 찾으려고 노력한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아일랜드 여인 필로미나 리의 얘기다. 필로미나의 이야기는 ‘필로미나(Philomena)’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2013년 오스카 최우수 작품상 등 4개 부문 후보로 지명된 바 있다. 영국 연기파 명배우 주디 덴치가 비운의 여주인공 필로미나 리 역할을 해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2009년에 발간된 ‘필로미나 리의 잃어버린 아이’라는 탐사기를 극화한 영화이다.
   
   아일랜드 시골 처녀 필로미나는 동네 청년과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저지른 불장난으로 19살에 임신을 하게 된다. 미혼인 딸이 임신을 하자 부모는 이웃 몰래 필로미나를 당시 미혼모를 수용하던 ‘모딜린, 회개하는 여인들을 위한 피난처’라는 곳으로 보낸다. 일명 모딜린 세탁소 혹은 모딜린 피난처라고 불린 이곳은 가톨릭 수녀들이 1700년대부터 운영해 왔다.
   
   수용소 이름에서 알아챌 수 있듯이 당시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10대 미혼모를 ‘타락한 여인(Fallen Woman)’이라고 불렀다. 여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노동으로 뉘우치면서 회개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수용소는 원래 창녀(당시 아일랜드에서는 퍼블릭 우먼(public woman)이라고 칭했다)들을 거두어 관리하려고 만든 기관이었으나 나중에는 혼전 임신녀들까지 수용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 임신은 부부 사이에서만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서 혼전 순결은 여인이라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가치라고 여겼다. 혼전 임신한 10대 소녀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저버리고 악에 떨어진 여인으로 인간 대접도 못 받았다. 미혼모들은 수용소에서 해산을 기다리면서 세탁일을 해야 했다. 죗값을 치러야 하니 당연히 노동에는 월급이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해산을 하면 아기는 엄마에게서 떨어져 바로 입양 보내졌다. 해산을 하고 아기를 뺏긴 후에도 수용소에서 금방 나올 수 없었다. 일정 기간 무료 노역을 한 후 죗값을 다 치렀다고 판단될 때만 풀려날 수 있었다.
   
   수용소에는 창녀부터 경범죄인, 정신병자, 성추행을 당한 아동, 심지어는 너무 활달하고 아름다운 소녀들까지 다양한 인간군이 수용돼 있었다. 활달하고 아름다운 소녀들은 타락의 위험이 크다고 해서 가족들에 의해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만큼 아일랜드의 당시 도덕관은 대단히 엄격했다. 길게는 70년 전 짧게는 50년 전까지 문명국이라는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국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일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고 있었다.
   
   
   ‘필로미나’의 비극
   
   필로미나는 19살에 ‘천사 같은’(필로미나의 묘사) 아들을 낳았다. 원래 아기 얼굴을 보면 안 되지만 간청한 끝에 매일 일한 후 유아실로 가서 아기를 보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가 보니 아기는 이미 양부모와 같이 수용소 문을 나서고 있었다. 미국 가정으로 2000파운드에 팔려간 것이다. 필로미나는 모딜린 세탁소에서 그후 10년을 무보수로 일하고 나서야 풀려나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 후에도 헤어진 아들을 하루도 잊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가 결혼을 해서 낳은 딸에게 50년 전 자신의 사연을 얘기했고, 딸은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파티에서 만난 기자에게 어머니 사연을 전하고 아들을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기자와 필로미나는 제일 먼저 더블린의 모딜린 수용소를 찾아간다. 필로미나로서는 40년 동안 외면한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던 곳이었지만 안 갈 수가 없었다. 필로미나는 자신이 해산하던 당시 있었던 수녀도 만나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당시는 입양 아동에 대한 인적사항을 알려주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결국 기자는 아들이 입양되어 간 곳을 알아내고 필로미나와 같이 미국으로 간다. 아들은 미국에서 법을 전공해 공화당 수석 고문변호사로 출세했지만 필로미나가 미국으로 갔을 때는 43세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로 세상을 뜬 상태였다. 어머니가 찾아가기 7년 전 이미 죽음을 맞았다.
   
   여기서 소설 같은 반전이 있다. 아들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알려고 모딜린 수용소를 수차례 찾아갔지만 수용소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모자가 평생 서로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 아들은 유언으로 자신이 태어난 수용소 묘지에 묻어달라고 했다. 얼굴도 모르지만 죽어서라도 어머니의 손길이 남아 있는 곳에 묻히고 싶다는 뜻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어머니가 자신을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을 듯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필로미나가 아들에 대한 소식을 알려고 수용소로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곳에 아들이 묻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모자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제도에 희생된 모자는 법이라는 침묵의 벽에 부딪혀 서로 간절히 찾으면서도 끝내 만나지 못했다.
   

 

 

 

 

   앤 킨 하원의원과 아들의 재회
   
   또 다른 미혼모인 앤 킨 스토리는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앤은 노동당 하원의원으로 고든 브라운 노동당 정부 시절 보건부 차관을 지낸 여인이다. 앤은 17살 때 동네에 온 미남 기혼자 영업사원과의 첫 데이트에서 강제로 임신이 된다. 비틀스와 롤링스톤스를 좋아하던 소녀에 불과했던 앤은 임신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앤의 부모는 동네 창피한 일이라고 딸을 먼 친척집으로 피신 보내지만 거기서도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불행을 겪는다. 결국 미혼모를 위해 만들어진 ‘모자집’으로 보내지는데, 그곳에서 앤은 부른 배를 안고 무릎으로 기면서 마루를 닦아야 했다. 일종의 벌이자 밥값이었다. 그러는 사이 모자집의 직원들은 앤을 향해 이기적인 악질이라고 계속 욕을 해댔다. 해산도 쉽게 되지 않아 외음부 절제 수술을 해야 했지만 병원에서는 마취제도 주사하지 않고 수술했고 수술 후에도 진통제를 주지 않았다. 앤의 고통은 말도 못했다. 일종의 벌로 교훈을 준다는 목적이었는지 병원 직원들조차 “이제 네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받는다”라고 했다. 앤은 당시의 지독한 고통도 아기를 지킬 수 있었다면 용서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해산 후 앤은 어린 나이였지만 아기를 옆에 있게 해달라고 빌고 빌어서 열흘 동안만 같이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앤은 아들의 발에 둥근 자국이 있어서 나중에 봐도 알아볼 수 있을 듯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앤은 아기를 만지고 안고 얘기하고 키스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라도 쉽게 찾을 수 있게 제이슨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러나 8일째 되는 날 아침 아이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아기는 없는데 모유가 나오자 그것이 가장 슬펐다고 앤은 말한다. 앤은 아기에게 채웠던 팔띠, 아기 침대에 누운 아기 사진과 침대 이름표, 신발을 평생 보관했다.
   
   당시 입양 상황을 앤은 ‘강압설득(coercion)’이라고 표현했다. 모자집 직원들은 “아이와 너를 위해서는 입양이 최선이다. 너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포기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아이도 사생아라는 어두운 그늘에서 살기보다는 입양 가서 정상적인 집안의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앤은 1972년 성탄절 즈음에 아들의 나이인 5살 아이가 탈 만한 빨간색 예쁜 자전거를 백화점에서 보았다. 정말 아들에게 사서 선물로 주고 싶었지만 줄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앤은 자전거를 사 백화점 주차장에 놔두고 왔다. 그런 자전거를 탈 만한 아기를 가진 가족이 발견해 아이에게 주면 좋을 듯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앤은 나중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가진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1994년 4월 23일 45살의 앤은 28살의 아들 제이슨을 드디어 만났다. 앤은 그동안 자신이 아들을 버렸다는 죄의식에 찾을 생각도 못 했는데 아들이 먼저 엄마를 찾으려고 노력해서 연락처를 알아냈다. 1976년 아동보호법이 생기면서 그전까지는 금지되었던 입양아에 대한 추적이 법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양기관에서는 엄마가 너를 만나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아들에게 경고했다. 앤은 “누군가가 언니를 간절히 만나기를 원한다”는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는 평생 소원이 풀림을 알았다. 자신의 집에서 아들을 만난 앤은 철없던 시절에 만났던 한 남자를 너무나도 닮은 잘생긴 아들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아들에게 수천 번 미안하다고 했고 아들은 미안해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아들을 만나고 3년 뒤 앤은 하원의원이 되었다. 아들을 만날 때 마침 공천심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공천심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고 했다.
   
   아들은 앤을 만난 다음 날 꽃다발과 함께 엄마 테디베어가 아기 베어를 안고 있는 가족 그림이 들어 있는 카드를 받았다. 카드에는 ‘아들이 태어났어요. 마크라고 이제 불리는데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는 당신을 사랑해요. ×××(키스 표시)’라고 쓰여 있었다. 아들은 양부모가 지어준 마크라는 이름을 엄마가 지어준 제이슨으로 바꾸었다.
   
   
   정부 사과 요구하는 피해자들
   
   영국에서 자식과 생이별을 한 미혼모들은 지금 대부분 70대로, 아직도 자식을 못 만난 엄마가 대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앤은 행복한 엄마인 편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인 “예! 아들이 하나 있어요”를 어디를 가든 이제 자랑스럽게 얘기한다고 했다.
   
   앤은 자신을 모자집으로 보낸 부모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다. 결국 이건 역사의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앤은 “나는 아들을 포기하거나 버린 적이 없어요. 정부가 사과로 나와 내 아들의 명예를 다시 찾아주어야 합니다. 이제는 역사의 불의를 정부가 사과해야 할 때 입니다”라고 강조한다. 앤은 자신의 정치경력을 이용해 그동안 강제입양 문제의 사회공론화에 앞장서 왔다.
   
   강제입양 피해자들이 정부로부터 사과를 원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당시 정부가 그런 강제입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용인했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용인하는 정도를 지나 나서서 권장까지 했었다. 강제입양이 행해지던 때 영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와 도덕 관념은 그런 조치를 당연시하게 만들었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당시 정부를 대신해서 현 정부가 대표로 사과하라고 요구한다.
   
   피해자들은 공식 조사도 요구한다. 당시 사회통념이었다느니 문화가 그랬다느니 하는 식이 아니라 분명하게 어느 선에서 누가 결정했고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를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사자를 처벌하기 위함이 아니고 진실을 알아내 내가 어떤 제도에 의해 희생되고 고통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과거의 장을 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그동안 영국을 제외한 다른 영연방국가들은 정부 사과와 함께 보상까지 했는데 왜 영국 정부는 가만히 있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2017년 강제입양 문제 단체들의 공식 조사 요구를 보수당 정부가 왜 충분한 정당성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했는지 정부의 대답을 원한다. 영국에는 그동안 강제입양에 관한 수많은 신문기사, 영화, 책이 있었음에도 보수당, 노동당 할 것 없이 정부가 눈을 감고 묵살한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한국의 미혼모들이 낳은 입양인들. 입에 풀칠도 못 하던 시절 부자 나라에 가서 잘 살아달라고 입양기관에 맡겨진 입양인들. 그리고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 잃고 고아가 되어 입양된 입양인들. 이들이 바로 1960~1970년대 외국행 항공기에서 청년 혼자 쩔쩔매며 데리고 가던 우리의 아이들이다. 하도 울어 아이들을 데려가던 아르바이트 청년도 울어버리게 만들던 그 아이들이 이제는 생부모를 찾아 한국에 온다는 신문기사를 본다. 다행히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한다는데 그런 기사를 보면 늘 가슴 한구석이 짠해진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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