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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음악으로 만나는 런던-31
닉 드레이크
 
세 번의 좌절과 단 한 줄의 희망 
이 가을 다시 우울이 찾아 왔다, 낙엽처럼. 내 기억의 시작인 다섯 살 이래로 반복적으로 나를 찾아온 우울이라는, 인생의 직업병. 우울은 반대말을 찾기 어려운 절대적인 단어, 우울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그 원인을 안다면 그것은 이미 우울이 아닌 고통이거나 슬픔일 것이다. 우울은 보다 신비로운 것이다. 우울은 이세상 어느 것도 조정할 수 없는, 생명처럼 신비로운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평생 우울과 만나지 않은 ‘생활의 달인’이 있다면, 연락주기 바란다. 밥 한끼 기꺼이 사드리고 싶다. 낙엽처럼 사라지는 우울의 불꽃에 머무는 이 계절, 우울한 음악을 듣고 있다. 우울한 음악 속에서 우울의 불꽃이 스스로 타 없어지길, 기다릴 뿐이다. 우울한 음악이 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는 우울이 스스로 몸부림치며 타버리는 데 필요한 산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음악 속에서 우울이 스스로 사라지는 순간의 희열이야말로 우울의 진정한 천적임을 이 가을 다시 느껴야 할 것 같다.    
본인이 우울과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닉 드레이크(Nick Drake, 1948~1974)의 음악을 권하고 싶다. 이열치열처럼, 이판사판 공사판처럼. 닉 드레이크를 못 들어본 사람은 우울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매우 적을 것이다. 닉 드레이크는 살아 생전 단 한 곡의 노래도 히트 차트에 올려 놓지 못한 무명의 싱어 송 라이터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세상에서 꽃피우기 전인 스물 다섯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발표한 세 장의 앨범들은 오늘날 모두 명반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사망한 지 십 년이나 지난 후에 그의 음악은 우울한 음악을 사랑하는 마니아들에게서 열렬한 찬사를 받게 된다. 그의 음악은 한 우울한 싱어송라이터의 짧은 열정의 기록으로 음악사에 선명히 남아 있다.
닉 드레이크는 음악을 하기 전 엄친아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인 말보로 컬리지에 입학했다. 수줍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그는 다방면에 재주를 지닌 우수한 학생이었다. 럭비팀 주장이었고, 100야드 달리기 기록 보유자였으며, 학교에서 가장 큰 하우스의 캡틴이었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용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던 그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많은 걸 알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졸업 후 케임브릿지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는데, 윌리엄 블레이크(‘그림으로 만나는 런던’에 등장했던 그 기이한 화가 겸 시인)를 공부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신비 속에 빠져든 그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갓 스물이던 닉 드레이크는 미국의 젊은 프로듀서 조 보이드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데뷔앨범 <Five Leaves Left(69)>를 발표한다. 수정 같은 기타와 섬세한 현악 반주와 어우러진 그의 슬픈 목소리는 분명 나이에 비해 조숙한 음악적 완숙미를 보여주었다. 조 보이드의 영향으로 영국 포크계의 유명한 두 톰슨인 <페어포트 컨벤션>의 리차드 톰슨과 <펜탕글스>의 대니 톰슨이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섬세한 음악적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런던으로 이주하여 발표한 두번째 앨범이 재즈취향이 드러나는 역작 <Bryter Layter(70)>다. 이번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멤버였던 천재 음악가 존 케일이 비올라 주자로 참여하였지만, 팬들의 반응은 역시 냉담했다. 연이은 두 번의 실패로 소심한 성격의 닉은 심한 좌절에 빠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슬픈 자신의 음악은 그저 자신에게 더 큰 슬픔만을 안겨줄 뿐. 자신감을 잃은 닉은 공연하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인터뷰를 기피하는 이상한 뮤지션이 되어갔다. 몇몇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전혀 빛을 보지 못하는 무명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 시절 영국 팝계의 상황이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락의 새로움이 런던의 젊은 음악 팬들을 매료시키던 시절이었다. 포크 싱어들이 주류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내기 무척 힘들었다. 
닉은 긴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마지막 앨범 <Pink Moon(72)>을 발표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신비한 영적 체험이라도 한 것일까? 이번에는 오케스트라 반주 같은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다 빼고 혼자 어쿠스틱 기타와 피아노를 연주하며 단 몇 시간의 녹음으로 앨범을 완성한다. 가장 침울한 음악이었다. 필자가 생각하는 닉 드레이크 최고의 앨범이지만, 역시 단 몇 천 장이 팔려 나가는 실패작이 되고 만다. 이 마지막 앨범에는 닉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희망의 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슬픔 속에 침잠된 그의 가사 가운데 돋보이는 한 줄의 긍정적 발언은 <From The Morning>이라는 곡의 마지막 부분이다. “이제 우리는 날아 오른다, 그리고 어디든지 있을 것이다.” 이 그의 유일한 희망의 선언은 위릭셔에 위치한 그의 무덤에 새겨져 있는 묘비명이기도 하다.
분노에 가까운 좌절을 맛보았을 닉은 프랑스로의 이주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 소박한 계획도 실천하지 못한채 1974년 11월 사망하고 만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다섯이었다. 항우울제를 과다 복용한 것이 원인이었는데 검시관의 어이없는 사인은 자살이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떠나고 한참 뒤 영국인들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게 된다. 죽은 뒤에야 음악잡지 <Mojo>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한다. 닉 드레이크의 음악은 그가 공부한 블레이크나 예이츠 같은 시인들의 영향이 보이는 상징적 가사와 독창적 기타주법 속에 우울한 아름다움을 표현해낸 매우 값진 음악이다. 황폐한 세상과 맞서는 가냘프고 슬프지만 섬세한 목소리. 아름다운 우울이라고나 할까? 우울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라면 뭐 좀 가져도 어떨까 싶게 만드는 오묘한 마력? 봅딜런, 밴모리슨, 마일스데이비스, 러브, 사이먼앤가펀클, 바하, 랜디뉴먼, 팀버클리, 시벨리우스...... 그가 좋아했다는 음악가들이다. 그의 무덤에 가서 들려주려고 기억하고 있는 목록이다. 언젠가 기꺼이 함께 가줄, 만만한 사람을 찾게 되다면 말이다. 우울의 큰형 닉 드레이크의 단 한 줄의 희망을 주머니 깊숙이 나누어 넣고 함께 기차를 타고......        



글쓴이 최동훈은 카피라이터, 디자이너로 활동하였으며 광고 회사를 운영하였다. 어느날 런던에 매료된 그는 문화가 현대인을 올바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신념을 붙들고 런던을 소개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londonv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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