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성탄절 오후 3시. 영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연설을 듣는다. 1952년 즉위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매년 행하는 크리스마스 연설이다〈사진〉. '여왕 폐하의 가장 자애로운 연설(Her Majesty's Most Gracious Speech)'이란 명칭은 '지극히' 영국적이다. 이 연설은 1932년 여왕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BBC 월드 서비스 라디오 방송 출범을 기념해 한 것이 효시다. 이어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가 1939년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에게 성탄 인사를 보낸 것을 계기로 정례화됐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안도감(comfort from ordinary daily repetition)'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영국인의 독특한 성격과 성탄의 기쁨,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져 듣는 이들도 덩달아 자애로워진다.
연설은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내용을 여왕이 직접 쓴다.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니다. 한 해를 반추하고 새해에 대한 각오와 국민에게 보내는 덕담을 주로 담는다. 왕실 가족의 시시콜콜한 소식도 단골 소재다. 이 별 내용 없는 연설이 영국에선 매년 인기 높은 프로그램 중 하나로 꼽힌다. 지난 2015년엔 750만명이 시청해 그해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다운튼 애비(690만명)'를 가볍게 제쳤다.
연설 전파는 영국 영토에 멈추지 않는다. 영연방 53국 중 영국 여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16국에 방송한다. 나머지 37국도 뉴스 등의 형식으로 전달된다. 지구 육지 면적의 약 20%(3000만㎢), 세계적으로 24억명을 영향권에 둔 셈이다.
지난 12일 열린 영국 총선에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내건 현 집권 보수당이 압승을 거뒀다. 영국은 수십 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유럽과 헤어지고 홀로 서겠다고 단단하게 결심했다. 그런 큰소리는 자기들 뒷마당에 거대한 영연방이 있다는 자신감도 한몫 한 것일까.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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