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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한 번 본 인상이 아주 오래 남는 사람이 있다.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세 딸 중 막내 안레오노라가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 일행이 지난해 3월 방문해서 2시간 정도 머물다 떠날 때 그녀는 눈물을 보였다. 흡사 아주 친한 친구가 정말 오랜만에 와서 같이 지내다가 헤어질 때 섭섭해서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옛날 우리 어머님 세대나 보이던, 요즘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정이 전해져서 마음이 짠했다. 안레오노라는 1952년생이니 아직 만으로 칠순이 안 됐는데도 그런 점을 잃지 않고 있었다. 현재 안레오노라는 안익태 유택 2층에 살면서 1층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다. 어머니 롤리타 여사가 2009년 아흔넷에 타계한 후 안익태 선생의 남은 흔적을 혼자서 지키고 있다. 적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올 터인데도 온갖 정성을 다해 맞고 있었다. 안익태 성채의 마지막 파수병의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안레오노라는 어머니를 가장 오래 곁에서 모셨고, 막내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아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듯했다. 한국에서 살기도 해서인지 한국에 대한 애정도 깊다. 아들 미구엘도 외할아버지 안익태의 성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중간이름도 ‘익태’라고 개명해서 쓸 정도로 모자의 한국 사랑은 깊다. 미구엘의 풀네임은 안 익태 미구엘이다. 미구엘의 애칭은 ‘작은 익태’라는 뜻의 스페인 말 ‘에키토’이다.
   
   안익태의 유택이자 기념관이 위치한 팔마는 스페인 남부 지중해 중간에 있는 마요르카섬의 중심 도시이다. 마요르카는 유럽 최고의 휴양지 중 하나이다. 연 10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조그만 섬으로 온다. 기념관은 멀리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주택가 언덕 위의 이층집이다. 이 집은 1990년 팔릴 위기에 처하자 스페인 라스팔마스의 교포기업 인터불고 권영호 회장이 25만달러에 매입해 수리한 뒤 한국 정부에 기증한 덕분에 기념관으로 남았다.
   
   원래 대면 인터뷰가 계획되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이메일로 만족해야 했다. 안레오노라는 자신의 이름은 아버지가 베토벤의 여신 ‘레오노라’를 생각하며 지어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를 ‘거장(the Master)’이라고 칭할 만큼 깊은 존경을 표했다. 외손자 미구엘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서울에서 8년을 살았다고 한다. 현재 변호사이고 서울 한양대학교에서 국제법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말도 잘한다”고 안레오노라가 자랑했다. 안레오노라는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하는 어머니와 함께 1980년 한국에 와서 방송국에서 일하다 1983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 한국대사관에서 10년간 일했다. 어머니가 말년에 도움이 필요하자 마요르카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돌보고 안익태 기념사업과 관련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수년간은 마요르카에서 열린 아버지 관련 음악회도 도와주고 책과 리포트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영향으로 고전음악을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100명도 넘는 오케스트라 연주에서 한 악기의 틀린 소리도 잡아낼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자연을 깊게 이해하는 사람”
   
   어머니 롤리타 여사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위대한 어머니를 가졌답니다. 어머니는 2남7녀의 대가족으로 바르셀로나의 전통적인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외가는 외교관과 변호사 같은 전문직 집안이었어요. 그때 여자는 대학교를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오로지 외국어만 배웠다고 해요. 어머니는 전문가 수준의 피아노 연주자였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잘하셨어요. 그 덕분에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아버지와 18년을 사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몇 년간 검은 상복만 입으시고 깊은 슬픔에 잠기셨어요. 훌륭한 품성 덕분에 평정을 되찾아서 남편과 보냈던 좋은 시간만 기억하고 그 시간에 감사했답니다. 물론 한국과 한국인들이 많이 도와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아버지 음악 연주회가 열리면 어머니를 꼭 초청했습니다. 스페인에 오시는 대사님이나 큰 기업가들도 어머니를 많이 찾아주셔서 위안을 많이 받으셨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이 한국 속에 있다고 느끼셨어요. 한국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는 마음으로 어머니는 2005년 3월 16일 애국가의 판권을 한국에 기증했습니다.”
   
   안익태와 부인은 어떻게 만났을까? “1943년 아버지는 당시 바르셀로나 최고의 공연장 라이시엄극장에서 베토벤 3번과 5번 교향곡을 연주해 달라고 초청받았어요. 어머니가 외할아버지와 같이 음악회를 보러 갔다가 공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으러 갔어요. 서로 잘 아는 친지분들이 거기 있어서 인사를 나눴고 아버지 측에서 어머니에게 연주회의 통역을 요청했어요. 아버지의 연주가 바르셀로나뿐만 아니라 발렌시아, 마드리드까지 이어지게 되면서 두 분은 사랑에 빠졌어요. 두 분은 1946년 7월 5일 바르셀로나 예수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유럽 전체가 전쟁 때문에 파괴된 데다 교향악단은 제대로 기능을 못 하고, 여권 문제도 해결이 안 된 상태여서 상황이 아주 어려웠다고 해요. 이미 지휘자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외할머니의 걱정이 크셨다고 해요.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혼을 하신 거죠.” 그의 설명이다.
   
    
   “행복하게 나가서 더 행복해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94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정원으로 연결된 베란다에 앉아 끝도 없이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남편이었는지를 얘기하곤 하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슬픔에 잠겼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글을 남기는 일로 슬픔을 달랬어요. (이 글은 ‘나의 남편 안익태’라는 제목으로 신구문화사에서 1974년 출간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 옆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말하셨어요. 결국 돌아가신 지 두 달 뒤인 2009년 7월 국립현충원에 있는 아버지 곁에 묻히셨어요. 어머니 말년의 어느 날 오후로 기억됩니다.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안익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을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셨어요.”
   
   그에게 아버지 안익태는 어떤 존재였는지 물었다.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그는 “아버지를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마요르카 교향악단 창설자로 활동하면서 1946년부터 12년간 우리들 옆에 계셨어요. 그리고 세계 투어를 다니기 시작하셨어요. 나는 행복한 소녀였지요. 막내딸이라 아버지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는 연주 연습을 하러 가실 때는 행복하게 나가셨고 항상 더 행복하셔서 돌아오셨어요. 나는 한번도 아버지가 자신의 일에 대해 불평하는 걸 들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언제나 집안은 즐거웠어요. 딸 셋을 비롯해 집안 모든 일을 아버지는 어머님에게 맡기셨어요. 집에는 교향악단과 협연하러 전 세계에서 오는 독주자를 비롯해 언제나 손님으로 가득 찼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차를 즐겁게 준비하시고 친구들과 연주회에 관해 얘기하시곤 하셨어요.”
   
   안레오노라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함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했다. “아버지는 우리 세 자매를 엄청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자유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답니다. 집 주위는 소나무, 아몬드 나무들과 바다로 싸여 있었어요. 아버지는 정원에 채소 심는 것을 좋아하셨고 고추와 토마토를 주위에 나누어 주셨어요. 대부분의 시간은 뭔가 연구하거나 책이나 악보를 보거나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첼로, 피아노, 트럼펫,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작곡할 때 가끔 피아노를 한두 음 친 거 말고는 직접 연주하는 걸 본 적은 없어요. 아버지는 음악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자신은 언제나 정적(靜寂)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나를 어깨에 태우고 어머니와 긴 시간을 같이 걸은 일이 기억납니다. 그때 아버지는 휘파람을 불고, 그리고 조용히 뭔가를 듣고, 다시 휘파람을 불고 미소를 지으셨어요.”
   
   그에게 아버지는 보통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직업과 삶을 통해 많은 걸 가르쳐 주었다. ‘한국환상곡’을 테이프 플레이어에 걸고 들려 주기도 하고, 한국 역사를 손짓까지 해가며 가르쳐 주었고, 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살면서 깊은 고통에 부딪힐 때마다 음악은 큰 위로가 됐다고 한다. 무엇보다 큰 유산은 열린 마음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동안 17개국의 사람들이 기념관을 다녀갔고 그는 온 세계에 친구가 있다고 했다.
   
   음악가로서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거장”이라는 한마디로 답했다. “아버지는 첼리스트로, 지휘자로, 작곡가로서 음악가로 최고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조국의 애국가를 작곡하셨지요. 자신의 정신과 재능만으로 그 모든 문을 열었어요. 아버지는 베토벤 전문이셨어요. 뿐만 아니라 바흐를 연구하셨고 위대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로부터도 배웠지요. 물론 59세로 일찍 돌아가셔서 자신의 꿈을 다 이루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가서 음악원을 만들어 후진을 키우고, 그들과 같이 국립교향악단을 창설해 세계순회공연을 다니고, 한국적인 주제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안익태는 1962년 한국 최초의 고전음악제인 ‘서울 국제음악제’를 창설했으나 한국 음악계의 사정으로 3회에 그치고 말았다. 영웅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유족들에게 재산도 제대로 못 물려준 이유가 이 음악제에 사재를 털어넣었기 때문이다.
   
   
 

   “고통도 지나면 크지 않아요”
   
   아버지가 아닌 인간 안익태를 묻는 질문에 그는 어머니가 남긴 글을 인용했다. 배경 설명은 이렇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의 80세 생일날 안익태에게 축하공연 지휘를 맡아달라고 했다. 1930년 4월 도쿄음악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왔다 미국 신시내티음악원 입학을 위해 그해 9월 출국한 이후 25년 만의 조국 방문이었다. 5만여명의 청중 앞에서 200여명의 음악가가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끝부분 애국가 합창이 끝날 무렵 청중들의 박수가 나오기 전 안익태는 뒤로 돌아서 지휘봉을 들어 청중들이 애국가를 같이 부르게 했다. 작곡가의 지휘에 맞춰 5만여명의 합창이 울려퍼졌다. 청중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렀고 지휘를 하는 안익태의 얼굴도 눈물에 젖었다. 한국 내에서 최초로 자신의 ‘한국환상곡’을 연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안익태는 마요르카로 돌아가는 길에 일본에서 다시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마요르카로 돌아온 안익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삶은 모든 고통을 상쇄해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순간으로 가득 차 있어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온갖 고통, 수고, 갈등에 가득 찬 날이 닥쳐 오게 마련이오. 그것들이 와 있을 때는 너무 큰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별로 크지 않아요. 결국 언젠가는 완전히 잊어 버리게 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때를 맞게 되지요. 당신은 알아요? 한국에서 내 곡이 내 지휘로 연주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 바로 그걸 뜻하오.”
   
   부인이 안익태에게 ‘한국을 방문한 그 순간이 당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냐’고 물었을 때 안익태는 한참을 정지하고 아주 진지한 태도로 눈을 감고 집중해서 대답했다고 한다. “예! 아마도 그럴 거요. 한국에서… 예! 그 순간들은 완벽하게 완성된 순간이었어요. 그러나 내가 도쿄에서 내 ‘한국환상곡’을 지휘하고 일본인 합창단이 우리 애국가를 부를 때도 나는 그런 완성의 만족감을 느꼈다오.”
   
   부인이 “정복자 나라에서 음악으로 정복한 승리는 정말 얼마나 멋진 복수인가”라고 말하자 안익태는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오! 당신은 내가 복수를 해서 만족한다고 생각하오? 아주 이상한 생각을 하는군요. 아니오! 그건 아니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음악은 인간을 통합하게 하고, 서로 사랑하게 만들고, 형제가 되게 만들어요. 내가 만일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내 지휘봉은 펜싱검처럼 보였을 거고 그걸 그들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면 그들 누구도 내 지휘를 따라 노래 부르지 않았을 거요. 그러나 그들은 내 지휘봉에 따라 사랑과 성의를 가지고 아주 열심히 연주와 노래를 했다는 내 말을 믿어주시오.”
   
   광복된 지 10년 되는 해에 일본의 심장 도쿄에서 안익태는 일본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우리말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부르게 했다. 그 당시에 그걸 연주하는 일본 교향악단원이나 애국가를 노래하는 일본인 합창단원들이 가사의 뜻을 모르고 불렀을까? 뿐만 아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 행사에서 ‘논개’ 곡을 지휘 연주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작품 ‘논개’가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안익태가 강력 주장해서 결국 이뤄냈다.
   
   
   “애국가와 한국은 항상 내 마음속에”
   
   그는 어머니가 남긴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게 바로 내 아버지입니다. 나는 이 구절을 아주 여러 번 읽었어요. 내가 젊었을 때는 이해를 못 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고 신앙심이 깊어가면서 나는 아버지의 인류애와 독실한 신앙심을 이해하게 되었답니다”라고 말했다. 친일 논란을 의식해 아버지의 진심을 전하고 싶은 듯했다. 그는 “애국가와 한국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그는 1977년 아버지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때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순간 울려퍼진 군악대의 진혼곡, 도로변의 인파, 박정희 대통령 등 빗속에서 맞아준 사람들이 그가 기억하는 풍경들이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망대로 그는 한국으로 왔다. 그가 26살 때로 이혼하고 네 살 난 아들이 있었다. 그는 KBS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많은 친구를 얻었다. 무엇보다 몸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피를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3년여 서울 생활을 끝내고 다시 마요르카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스페인에 남아 있는 두 딸과 손자손녀를 보고 싶어해서였다. “2년마다 연주회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TV 등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어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보고 ‘롤리타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 곁에 묻히길 원했고 한국 정부가 모든 조치를 해준 덕분에 당신이 언제나 사랑하던 땅에 안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념관을 찾는 한국인들 덕분에 행복하다고 했다. 롤리타 여사도 자신이 한국인인 것처럼 느끼고 살았다고 한다. 매년 방문객이 늘고 있고, 특히 젊은이들의 방문이 늘어난 것을 두고 그는 “아름다운 일이다”라며 감격해했다. 그에겐 껄끄러운 질문이겠지만 아버지의 친일 관련 뉴스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물론 사람들이 길고 짧은 뉴스를 보내주어 알고 있지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버지는 세상 모든 사물에 신앙적인 존경을 가지고 있어요. 세계를 여행하고 ‘한국환상곡’을 지휘하고 음악을 듣고. 그런 것들이 모두 그의 세계입니다. 아버지의 세계에는 투쟁도, 원한도, 증오가 차지할 시간도, 공간도 없답니다. 아버지는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을 악보 없이 지휘했어요. 생전에도 아버지를 질시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 때문에 아버지도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버지를 애국자로 지정하면 해결되지 않을까요? 50년 뒤 아버지를 친일로 매도하는 이들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면 이런 논란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마요르카섬의 걸출한 아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밤을 새워서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기념관은 안익태의 음악 속에서 그와 많은 사람이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공간이다. 그는 “사람들의 통합이 만들어내는 큰 힘이 위대한 음악을 만든다”고 믿는다. 기념관을 찾은 사람들로 인해 이야깃거리는 점점 많아진다. 신임 스페인 한국대사가 부임하면 기념관을 방문한다. 한국 관리하에 있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탄생 11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보수 공사가 이뤄졌다.
   
   마요르카 정부는 2019년 4월 24일 안익태를 ‘섬의 걸출한 아들’로 지정했다. 팔마 시내 중심에는 안익태 거리가 있고, 마요르카교향악단은 자신들의 창설자를 기리는 공연을 매년 한다. 안익태만큼 한국인 최초라는 호칭이 많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첼리스트, 한국 내 첼로 독주회, 신시내티 교향악단 첼로 주자(1931), 카네기홀에서 NBC 하우스 오케스트라 한국환상곡 1·2악장 지휘(1935)와 첼로 연주(1931), 부다페스트에서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지휘 한국환상곡(1936), 더블린 아일랜드 라디오 교향악단 지휘 한국환상곡 초연(1938), 구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1942)과 베를린 교향악단(1943년) 지휘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영국 공영방송 BBC 주최 프롬음악회에서 1965년 7월 6일 뉴 필하모니어 교향악단을 지휘해서 자신의 교향시 ‘논개’를 공연한 것도 한국인 최초이다. 일제 치하의 한국에서 태어난 청년 한 명이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지휘하고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이 연주하게 했다. 1939년부터 1959년까지 20년 동안 유럽에서 안익태는 232회의 지휘를 했다. 1년에 두 번은 반드시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1938년 더블린 초연 때 아일랜드인 합창단이 한국말로 부른 애국가를 시작으로 40여차례나 유럽 어디선가 유럽인 합창단에 의해 불려졌다는 뜻이다. 세계 교향악단을 이렇게 두루 지휘 연주한 한국인은 안익태말고는 아직도 전무후무하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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