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현재 한국 언론에서 연일 다루고 있는 ‘외교적 홀대’ ‘외교 참사’, 거기서 더 나아가 ‘국격(國格)’ 논쟁 같은 것들을 영국 언론에서는 본 적이 없다. ‘국격’이란 단어를 네이버 영어사전에 넣어 봤더니 ‘national dignity’ ‘national status’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나 이 용어들을 구글링해 보면 영국 매체 어디서고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 ‘national prestige(국위)’로 찾아봤지만 우리가 쓰는 용어인 국격에 해당하는 글들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 영국은 오랫동안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이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영국도 외교라면 ‘선수’라 수많은 외교 관계에서 의전이라든지 다른 문제가 생길 수는 있다. 그런데도 ‘외교 참사(diplomatic disaster)’라는 용어를 구글링해 보면 관련 글이나 기사는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요즘 구글을 검색하면 ‘diplomatic disaster’라는 말이 들어간 기사가 있긴 하다. 바로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방문과 관련된 ‘코리아헤럴드’ ‘코리아타임스’ 그리고 영국 ‘가디언’의 기사들이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에도 ‘diplomatic disaster’라는 용어에는 굳이 따옴표를 단다. 영어에는 그런 용어가 없다는 뜻이다. 
 
 
 
“대단히 무례” 중국 비판한 여왕의 실언 
 
사실 영국에서도 외교적 참사라 할 만한 일들은 많이 일어난다. 지도자의 실언이나 말실수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난해 10월 말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를 앞두고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개인적 언급이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여왕은 웨일스 카디프에서 열린 하원의회 개원식에 참석해 입장을 기다리면서 옆에 서있던 찰스3세 부인 카밀라, 웨일스 의회 의장과 대화를 나눴다. 
이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여왕은 2주 뒤에 열리는 COP26에 대해 “기가 막힌 일이지 않은가. 나는 총회에 대해 많이 듣기는 했는데 아직도 누가 오는지는 모르고 있다. 우리는 누가 못 오는지는 알고 있다. (기후변화 대처에 대해) 모두들 말만 하지 행동을 안 하는 걸 보면 짜증이 난다(It’s really irritating when they talk, but they don’t do)”라고 했다. 여왕의 말을 들은 웨일스 의회 의장이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의 손자(윌리엄 왕세손)가 오늘 아침 TV에서 ‘우주로 가는 일이 무슨 소용 있나, 우리는 지금 지구를 구해야 하는데!’라고 하는 걸 봤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여왕은 “그래요 나도 읽었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여왕의 이 대화가 화제가 됐다. 여왕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이 발언이 화제와 논란이 되자 당시 교통부 장관이 나서 “개인적인 대화는 지켜주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항의도 했다. 물론 본인은 이런 대화가 공개된다는 생각을 안 하고 그냥 가까운 지인에게 하듯 얘기했을 것이다. 거꾸로 경험이 많은 여왕이 ‘고의적인 실수(Royal intentional mistake)’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잘 협의해서 말만이 아닌 결과를 만들어내라’는 묵언의 주문이라는 뜻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여왕이 위와 같은 ‘비외교적’ 언급을 해서 물의가 일어난 적은 또 있었다. 2016년 5월 버킹엄궁에서 열린 가든파티에서 중국 주재 영국대사와 대화 도중 벌어진 일이다. 가든파티 바로 직전에 있었던 시진핑 중국 주석의 영국 방문이 화제였는데, 대사가 여왕에게 시진핑을 수행한 중국 외교관에 대해 하소연을 했다. 이때 “대단히 무례했다 들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라는 여왕의 말이 카메라에 잡혔다. 대사는 여왕에게 “상당히 어려운 시험이었다”고도 했다. 시 주석의 방영 협상 중 중국 관리가 자신들의 뜻대로 안 했다면서 시진핑 방영을 취소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나가버린 사건을 말하는 중이었다. 어찌 보면 큰 외교적 참사가 벌어질 뻔했지만 당시 중국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발뺌을 했고 여왕의 언급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지나갔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도 총리 시절 말실수를 한 적이 있다. 부패방지 회의와 관련해 여왕과 버킹엄궁에서 대화하던 중 “나이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기가 막히게 부패하다 (fantastically corrupt)”는 말을 카메라 옆에서 해서 외교적으로 물의가 됐다. 그래서 나이제리아 대사가 항의하고 난리를 피웠지만 영국 언론은 ‘참사’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고 그냥 ‘실수(gaffe)’라고 넘어갔다.
 
고든 브라운 전 총리도 나이 든 노동당 지지자로부터 이민정책에 대한 신랄한 질문을 받다가 실언을 한 적이 있다. 브라운 총리가 측근들에게 “그건 정말 참사였어. 도대체 누가 저런 고집불통의 여자가 질문하게 만들었나”라고 대로하면서 다그치는 장면이 방송 카메라에 잡혔다. 브라운의 격한 성품은 정계 보좌관들 사이에서는 유명하다. 심지어 의회 내 펍에서 보좌관에게 먹다 만 콜라 캔을 던질 정도다. 그런데 방송사 마이크가 켜진 상태로 가슴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브라운과 보좌관 사이의 대화는 고스란히 방송을 탔다. 이런 일을 영국 언론은 ‘핫 믹(hot mic)’ 사건이라고 부른다. 마이크가 켜져 있는지 모르고 말을 해서 생긴 사건을 이른다.
 
영국 전직 총리 중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실언은 가히 전설적이다. 그가 테리사 메이 전 총리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하다가 메이가 만든 브렉시트 최종안에 반대하고 사임을 한 뒤 총리 취임 전 텔레그래프지에 쓴 기명 칼럼(2018년)이 대표적이다. 그는 칼럼에서 ‘부르카를 쓴 무슬림 여인이 복면을 한 은행 강도 같거나 우체통 같다’고 썼다. 정말 영국이 발칵 뒤집어질 인종차별 내용이었다. 당시 보수당 당기위원회가 조사에 들어갔으나 인종차별 비난이 아니라 복장을 비판한 것이라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존슨의 망언 “오바마에 케냐 피가…” 
 
존슨은 총리 때는 그래도 좀 조심을 했지만 런던 시장 때는 실언을 신경도 안 썼다. 2016년 4월 런던 시장 당시 존슨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버락 오바마를 향해 “오바마에 케냐 피가 섞여 있어서 대영제국을 미워한 탓에 백악관에 있던 처칠 흉상을 치워버렸다”고 비난했다. 
당시 오바마는 영국이 EU에 잔류하길 바라는 논평을 하면서 존슨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존슨이 ‘더선’ 칼럼에서 그런 막말을 한 것이다. 이 막말에 대해 당시 하원의원이던 처칠의 손자 니컬러스 솜스는 존슨이 차기 총리를 꿈꾸는 나머지 지지자 결집을 위해 ‘휘파람으로 개를 부르는 정치술수(dog whistle politics)’를 썼다고 혹평했다. 지지자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 옆으로 불러모으고, 적을 향해서는 공격을 하라는 좌표를 찍듯이 ‘선동술’을 펼쳤다는 비판이다.
 
존슨은 런던 시장이 되기 전 하원의원 당시에는 파푸아뉴기니인들을 ‘식인종’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2006년 보수당 전당대회 연설 중 “우리 보수당은 지난 10년간 파푸아뉴기니 스타일의 지도자 죽이기 식인 잔치를 벌였다. 덕분에 노동당이 미치광이의 축제를 벌이는 걸 우리가 봐야만 했다”고 말해버렸다. 
또 2012년 런던 시장 재임 중에는 “아프리카는 백인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칼럼을 ‘더스펙테이터’라는 보수성향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영국 언론과 사회는 당시에도 이를 외교적 참사라고 지적하며 논란을 키우지 않았다. 결국 유권자들이 나중에 현명하게 판단하기 때문에 굳이 논란을 키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영국인들의 생각이다.
 
 
 
  
 
끝이 없던 필립 공의 실언 
 
 
영국 왕족의 발언은 누구나 주시를 하고 흠이 조금만 생기면 언론이 크게 다룬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듯한 실언 몇 개를 빼고 나면 왕족의 실언 거의 대부분은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이 했다.
필립 공의 실언은 실언이라기보다는 농담 같은 진담이라고 영국인들은 여긴다. 그중에서도 재미있어 자주 인용되는 인종차별적인 농담이 있다. 바로 중국 방문 시 영국 유학생들에게 한 말이다. “자네들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눈이 찢어져서 집으로 간다”라고 한 것이다. 당시 중국 언론은 별로 상관을 안 했지만 영국 언론은 ‘필립 공이 또 사고쳤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그때도 외교 참사라는 말은 없었다. 그냥 ‘21세기에 사는 빅토리아 시대 할아버지의 실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였다.
 
필립 공의 실언은 나열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다. 파푸아뉴기니 방문 시 섬을 여행 중인 영국인들에게 “어떻게 잡아먹히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네”라고 말했고, 스코틀랜드 운전 교관에게는 “자네는 어떻게 여기 사람들이 시험에 합격할 동안만이라도 술에 안 취하게 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라고 했다. 또 스코틀랜드의 한 공장을 방문했다가 아주 오래된 전기 퓨즈통을 보고는 “인디언이 설치한 것이 분명하구만”이라는 실언도 했다. 그 말이 논란이 되자 필립 공은 “사실은 인디언과 미국 카우보이를 혼동해서 잘못 말한 것일세”라고 답변해 다시 미국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영어에는 ‘카우보이가 한 일(Cowboy job)’이란 용어가 있는데 일을 제대로 못했다는 뜻으로 쓰인다.
 
필립 공이 홍콩 세계야생동물기금 총회에서 한 실언도 아직까지 화제가 될 정도다. “발이 네 개 달려 있는데 의자는 아니고, 날개가 두 개 달려서 날아 다니는데 비행기는 아니고, 수영을 하는데 잠수함만 아니면 광둥 사람들은 다 먹어.” 이 발언으로 홍콩은 뒤집어졌다.
 
또 케냐 방문 때는 자신에게 방금 선물을 준 여성을 보고 “자네는 여자가 맞지?”라고 묻기도 했고 이탈리아산 포도주를 권하는 이탈리아 총리에게는 “그냥 맥주 한잔 줘. 어떤 맥주라도 상관없으니 그냥 맥주 한잔만 주면 돼”라고 말했다. 필립 공은 포도주를 별로 안 좋아하고 맥주와 위스키만 좋아했다.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는 실언도 꽤 있었다. 예컨대 휠체어를 타고 안내견을 옆에 데리고 온 장애 여성에게 “자네 아나? 요즘은 거식증에 개를 잡아먹는 걸?”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또 카리브해에 위치한 영국령 케이맨제도에 가서는 “니네들은 모두 해적의 자손들이지?”라고 해서 수행원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들었다.
 
  
 
독일서 ‘수상’이라는 금기어 입에 올려 
 
필립 공의 가장 끔찍한 실언은 1997년 독일 방문 시 있었다. 당시 무역박람회에서 만난 헬무트 콜 총리를 수상(Reichskanzler)이라고 불러 정말 주위 사람들을 잠시 아찔하게 만들었다. 2차대전 중 히틀러의 공식 직함이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 약칭으로 총통이었다는 이유에서 수상은 독일에서 금기어다. 
 
이제 왕이 된 찰스 3세의 경우는 아버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왕세자 때 몇몇 실언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스위스 스키 휴가 중 BBC 기자가 윌리엄·해리 왕자와 전화 인터뷰를 하던 도중 찰스가 “거지 같은 인간, 나는 그 인간을 참을 수가 없어, 그는 진짜 끔찍스러워, 진짜로 정말”이라고 소리치는 게 수화기 속에서 들렸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핫하고 힙한 영국(2022), 두터운 유럽(2021), 유럽문화탐사(2015),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영국인 발견(2010)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739 신앙칼럼- 제한된 공간에서의 자유 hherald 2022.11.14
2738 요가칼럼- 매일 7분만 따라하면 당신에게 벌어지는 기적같은 변화! hherald 2022.11.14
2737 헬스벨- Dr Begum과의 우정 hherald 2022.11.07
2736 신앙칼럼- 현대판 불로장생 hherald 2022.11.07
2735 부동산 상식- 집주인으로서의 책임,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hherald 2022.11.07
2734 요가칼럼-과식 후 최고의 칼로리 소모 폭탄 운동과 다이어트 요가 file hherald 2022.11.07
2733 이민칼럼 - 영국출생 자녀 영국과 한국 국적신분 hherald 2022.10.24
2732 헬스벨 - 복통, 장염, 설사로 시작하는 환절기 hherald 2022.10.24
2731 런던 통신 -불륜녀 딱지 뗀 카밀라, 어떻게 영국 민심을 돌렸나 hherald 2022.10.24
2730 신앙칼럼 -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hherald 2022.10.24
2729 요가칼럼- 헤드 스탠드(머리서기) 자세 도대체 왜 해야하는거죠? file hherald 2022.10.24
2728 요가칼럼- 초보자 다리찢기! 매일 하지 마세요 file hherald 2022.10.17
2727 이민칼럼 : 영국 취업비자 중도 퇴사와 환급금 hherald 2022.10.17
2726 헬스벨 : 근육 – 삶의 질을 좌우한다 hherald 2022.10.17
» 런던 통신 - 영국 지도자들의 아찔한 실언 퍼레이드 hherald 2022.10.17
2724 신앙칼럼- 행복한 날로 만드는 관찰자 효과 hherald 2022.10.17
2723 부동산 상식- 집의 습기(Damp) 문제, 종류와 예방법 hherald 2022.10.17
2722 헬스벨 - 내 입안에는 어떤 미생물이 살고 있는가 hherald 2022.10.03
2721 이민칼럼- 한국방문과 학생비자 갱신 hherald 2022.10.03
2720 신앙칼럼- 길을 묻는 그대에게 hherald 2022.10.03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