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영국인들 가슴에 빨간 개양귀비(poppy·포피) 꽃이 피었다. 지난 100년간 그랬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1월 11일 오전 11시 11분 영국인들은 포피 배지를 달고 2분간 묵념을 한다. 이맘때쯤 배지를 단 사람이 하나둘 늘면 '현충일이 돌아왔구나.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생각하게 된다. 배지는 보통 10월 초부터 11월 11일 현충일까지 단다.
1918년 11월 11일 3900만명의 사상·실종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1년 뒤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 조지 5세가 첫 기념식을 열었다. 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 중 하나인 벨기에 플랑드르 벌판엔 개양귀비가 유난히 많았다. 생김새와 색깔이 꼭 스러진 젊은이들의 심장과 같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 꽃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포피는 전쟁과 평화, 희생, 교훈을 상징하는 꽃이 됐다.
배지 가격은 정해진 게 없다. 본인이 알아서 모금함에 돈을 넣는다. 가장 간단한 종이 제품이 1파운드이고, 매년 4000만개 정도가 팔린다. 영국 인구가 6500만명이니 어린아이를 빼고 거의 모든 영국인이 하나씩 샀다고 볼 수 있다. 지난해 배지 판매 모금액은 5050만파운드(약 765억원). 전년보다 7.5% 늘었다. 올해 모금액 집계는 내년에나 나올 것이다.
배지는 동네 가게 등에서도 살 수 있지만 대부분 자원봉사자들이 길거리에서 판다. 5만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늦가을~초겨울의 찬 바람을 맞으며 길에서 포피를 판다. 지난달 영국에서 최고령의 포피 판매 자원봉사자였던 론 존스의 장례식이 있었다. 존스는 102세였고 작년까지 40년간 배지를 팔았다. 그는 2차 대전 중 포로가 돼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참전 군인이다.
영국인들에겐 100년 전 전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의 평화와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졌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영국인 가슴에 매년 피는 개양귀비에는 그런 비극을 다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바람이 담겨 있다.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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