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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한국의 지인들로부터 “영국 저력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 왜 이런 질문을 아직도 던지는지 이유부터 보자. 이런 질문 앞에는 늘 ‘옛날에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다. 특별한 제조산업도 없는 듯한데 아직 강국을 유지하는’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아직 영국 경제가 13억9700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 바로 밑, 프랑스 바로 위인 세계 6위(2020년 국내총생산 기준)라는 사실에 놀라서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영국의 국력이 한참 밑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인 곁에서 오래 살아온 필자의 경험에 근거해, 영국의 저력은 결국 영국인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희생, 봉사, 자선’에서 온다는 답을 찾는다. 영국인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상·중·하층 계급 막론하고 각자 나름의 ‘희생, 봉사, 자선’을 통해 ‘주는 자의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감이 영국 사회를 안정시켜 저력을 만들어낸다는 답이다.
   
   2012 런던올림픽을 돌이켜보자. 당시 1만5000여명의 올림픽 선수와 4200여명의 장애인올림픽 선수들, 그리고 연인원 300만여명을 도운 자원봉사자는 총 28만명의 지원자 중에서 엄격하게 선발한 7만명이었다. 이들은 6회에 걸친 교육을 받고 보통 2주, 길게는 4주간 봉사를 했다. 자원봉사라는 말 그대로 이들은 한 푼의 대가도 받지 않았다. 일정 이후의 식사는 물론이고 지방에서 온 봉사자는 교통비, 숙박비까지 자비로 부담했다. 이들에게 돌아가는 대가는 봉사자 제복과 자부심 가득한 추억밖에 없었는데도 28만명의 지원자가 전국에서 몰려와 4 대 1의 경쟁을 뚫고 무급 봉사자가 됐다. 그리고는 “아주 비싼 휴가, 그러나 돈이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없는 고급 휴가를 다녀왔다”고 자랑했다.
   
   연립주택 살면서 소형차 모는 데이비 장관
   
   영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닳고 닳은 하원의원과 ‘희생, 봉사, 자선’이 무슨 관련이 있느냐는 의문을 던질 수 있지만 영국 하원의원의 삶을 보면 정말 ‘자선’만 빠졌지 문자 그대로 ‘희생, 봉사’의 삶이다. 유럽 유일의 한인촌인 런던 서남부 뉴몰든 지역 자민당 소속 에드 데이비 하원의원을 몇 년 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당시 4선 의원(현재는 5선)이자 보수·자민 연립정부의 기후변화에너지장관이던 데이비 의원의 개인 차는 영국에서 지금도 가장 염가 브랜드인 포드였다. 연식이 14년 된 소형차(아반떼 크기)에 주행거리가 ‘20만6113㎞’나 됐다. 집도 영국에서 가장 서민들이 사는 테라스하우스(terraced house·골목길 양쪽으로 수십 채의 집이 줄이어 붙어 있는 연립주택)였다.
   
   데이비 장관의 집은 테라스하우스 중에도 유난히 좁아 거실에 제대로 된 소파를 놓을 여유도 없었고 서재는커녕 일할 공간도 없었다. 주방에 있는 식탁이 서류를 놓고 펼쳐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런 수준의 테라스하우스는 보통 노동자나 서민들이 사는 집이다. 영국 중산층도 이런 테라스하우스에는 살지 않는다. 인터뷰 당시 자동차가 하도 낡아 보여 “당신이 이런 차를 몰고 다닐 줄 몰랐다”고 하자 데이비 장관은 “영국 의원은 돈이 없다”라는 답을 당연한 듯이 했다.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는 데이비 의원의 당시 세비는 6만7060파운드(현재 8만1932파운드·약 1억2200만원)였다. 한국 국회의원 세비가 1억5200만원이고 영국 물가가 한국의 약 2.5배 정도 되는 점을 감안하면 영국 하원의원의 실질 세비는 한국의 5000만원이 채 안 되는 셈이다.
   
   데이비 의원이 특별한 경우도 아니다. 영국 하원의원 650명은 보좌관 한 명 제대로 못 두고(자신에게 할당된 예산을 쪼개서 써야 하기에 여러 명의 보좌관을 둘 수 없다) 관용차는 물론 기사도 없다. 상시 의회가 열리는 의원내각제라 거의 매일 붙어 있어야 하는 런던에 사무실도 없는 의원이 전체의 3분의2나 된다. 이들은 주중에는 지역구를 떠나 런던에 머물다가 주말이면 지역구에 내려가 가족도 만나고 지역구 일도 챙긴다.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들은 기차로 길게는 6~7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매주 왕복한다.
   
   
   직장 끝나고 의정활동 하는 지방의원들
   
   물론 이들에게는 한국처럼 도의원, 시의원 같은 지방의회 의원 추천 지명 권한도 없다. 자신의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려면 오히려 이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을’의 처지이다. 그렇다고 지방의회 의원(영국은 도의원, 시의원 등으로 구분하지 않고 모든 지방의회 의원을 카운슬러(councillor)라고 통칭한다)이라고 특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하원의원보다는 유권자들의 실생활과 더 직결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휘두를 권한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걸 자의로 남용하는 의원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카운슬러들의 세비도 거의 자원봉사 수준에 불과하다. 연봉이 평균 1만파운드(약 1500만원)에 불과하다. 카운슬러들은 겸직이 기본이라 자신의 직장이 끝난 야간에 활동이 시작되는데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다. 투입되는 시간과 업무의 강도에 비하면 거의 자원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왜 영국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영국 정치를 잘 아는 교민들 사이에서 나온다. 그만큼 영국 정치인들은 권한도 없고 특권도 없다는 말이다. 말만이 아닌 진짜 ‘봉사와 희생’ 정신이 없으면 불가능한 직종이다. 자신이 믿는 신조와 사상을 세상에 구현하겠다는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도 없이 고달프기만 하다.
   
   영국 정치인들을 옆에서 보면 자신의 직업이 생업이라고 여기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듯하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하긴 역사로 살펴보면 당연하다. 영국 정치의 꽃인 하원의원은 원래 자신의 계급, 직업, 지역의 이익을 대표하는 무급 봉사자였다. 하원의원이 세비를 받기 시작한 것은 의회가 생기고도 무려 600년이 지난 1918년부터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정치인은 ‘먹고살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숭고한 봉사정신을 앞세워야 제대로 된 정치를 한다’는 정신이 강했다. 우리가 영국 신사라고 부르는 젠틀맨(gentleman)의 어원은 영국 중산층인 젠트리(gentry) 계급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중산층 출신들로부터 시작된 영국 하원의원들은 그래서 지금도 의원을 안 하면 몇 배의 수입을 얻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능력에 비해 박봉을 받고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주간조선 2581호(2019년 11월 4일 자)에 소개한 대로 필자는 영국인 합창단에 참가(가입이 아니다.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다)해서 연습과 공연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때도 ‘희생, 봉사, 자선’을 앞세우는 영국인들의 ‘소확행’을 곁에서 지켜봤다. 당시 런던 한인촌 뉴몰든 옆 동네 윔블던 지역 아마추어 합창단 50여명이 3개월 동안 공연을 위해 매주 한 번 저녁에 모여 연습을 했다. ‘바흐 미사곡 B단조(BVW232)’가 워낙 좋아하는 곡이라 전곡을 불러 보는 ‘당사자의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매력이 합류의 이유였다.
   
   목적만 추구하지 친교는 없는 단체모임
   
   합창단 조직과 연습 과정은 영국에서 거의 40년을 살았으나 아직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했다. 우선 합창단은 이름이 없었다. 공식 직함의 회장도, 부회장도, 총무도 없었다. 그냥 지휘와 피아노 반주하는 사람 두 명과 잡일을 맡아 하는 ‘총무 같은’ 단원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연습에 뒤늦게 참가한 새 단원은 소개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연습 장소인 성당에 첫날 가니 돈을 내라고 했다. ‘내 시간 내서 연습하고 유료 공연에 참가까지 ‘해주는데’ 악보도 안 주면서 공연 참가비까지 내라니?’라는 의문은 뒤로하고 일단 돈 내고 연습을 시작했다. 참가비 30파운드(약 4만5000원)는 중간 휴식 시간에 다과비, 공연포스터, 안내장, 공연프로그램 인쇄비와 공연일 배경음악 연주를 해준 40여명의 프로 교향악단 초청 경비로 사용된다고 들었다. 다시 4만5000원을 내고 246쪽짜리 악보와 각 파트별 연습곡을 성악가가 녹음한 CD는 따로 사서 사용해야 했다. 결국 내 부담은 거의 10만원이었다.
   
   그다음부터가 한국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단원의 전화번호도 모으지 않았고, 통성명도 없었고, 중간에 단합 회식도 없었다.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모임은 물론 없었다. 더군다나 단원 친지 초청 무료 입장권도 없었다. 단원들 모두는 친지들에게 입장권을 팔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4000여파운드(약 600만여원)의 수익은 연습장과 공연장을 제공한 성당 수리비로 전액 기부했다. 필자는 공연 후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이 다 사라지고 나서 단원들은 사람들이 앉았던 의자를 하나하나 접어서 차곡차곡 쌓고 서로 인사도 없이 쿨하게 헤어지고 말았다. 누가 누구를 위해 한 합창이 아니니 누가 누구를 치하할 자격도 없고,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으니 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였다. 3개월 동안 연습을 같이 해도 중간 휴식 시간에 차 마시며 아주 가벼운 대화만 나눴을 뿐 이름도 서로 모르고 악수도 하지 않고 헤어지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한국인 정서로는 가장 이상했으나 나중에 돌이켜봤을 때 가장 합리적이라 여겼던 것은 연습기간 중 단원들 사이의 유대관계였다. 이를 필자는 ‘서로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서인지 활동을 같이해도 뒷말이나 헐뜯는 험담이 오가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적당한 거리를 차갑게 유지하면서 노래 연습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 공연 수입을 기부하는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뿐 구성원 사이 유대나 친목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영국인들의 태도라고 여겼다. 각종 해외 한인단체들이 온갖 잡음에 휩싸이는 이유가 바로 목적을 뒤에 두고 유대관계에 지나친 중점을 두는 태도 때문이다. 반면 영국인들은 합창단이 친목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서 애초의 목적인 자선모금에만 집중하자는 뜻인 듯했다. 그래서 모금과 기부가 끝난 뒤 지금까지 합창단으로부터 어떤 연락 한 번 받은 바 없다. 결국 합창단이 존재하지도 않음이 분명했고 그래서 합창단 가입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영국을 표현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자원봉사 비전문가의 상식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이다. 전문가가 아닌 생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이 자원봉사 차원에서 각종 크고 작은 기관과 단체의 관리위원(governor)이 되어 모든 결정을 상식의 차원에서 한다는 뜻이다. 국민들의 일상에 관계되는 일은 기관이나 단체를 평소 이용하는 당사자의 상식이 전문지식의 독선에 빠지기 쉬운 폐쇄된 전문가 집단보다 더 낫다는 국가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치안판사도 일반인들의 자원봉사
   
   예컨대 영국인이 일상에서 저지르는 음주운전, 교통법규 위반, 반사회적 행위 같은 사소한 경범죄에 대한 판단은 치안판사 법정(magistrate court)에서 이뤄진다. 치안판사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다. 동네 학교 교장, 지방의회 의원, 심지어는 동네 원로까지 치안판사가 된다. 그들은 법률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상식에 의해 판결을 하고 형량을 결정한다. 치안판사는 소액의 보수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보수 봉사이다. 치안판사는 정식 재판 판사들의 과중한 업무를 덜어줘 엄중한 사안에 더 집중하게 만들자는 차원에서 만든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매일 변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잡다한 사건에 법이 적시에 현실적인 대응을 못 한다는 점도 고려됐다. 기계적인 법조문 해석으로 재판을 하는 전문 법조인보다 비전문가의 상식에 의한 판단이 더 낫다는 오랜 경험이 만들어낸 지혜의 산물로도 볼 수 있다.
   
   뉴몰든 한인 교포들의 생사, 애환의 중심인 대형 의료기관 킹스턴병원의 최고의결기관은 관리위원의회(council of governors)이다. 이곳에서 킹스턴 인근 35만명 주민을 보살피는 2750명의 직원과 520병상을 둔 대형병원의 주요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이 관리위원의회 구성원 역시 일반인들, 특히 병원을 이용하는 소비자(8713명의 회원)에 의해 선출된 일반인 위원(16명)이 중심을 차지한다. 일반인 위원 외에는 의사를 비롯한 직원 중에서 선출된 위원(4명), 지방의회의원(5명), 지방자치단체가 파견한 의료전문가 요원(2명), 지방자치단체 직원(1명), 지역 고등학생(1명) 등 총 2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병원 의회 의원들인데 이들에 의해 병원 재단 이사장과 비상임 이사가 선출되고 해임된다. 또한 연간 예산 책정과 함께 외부 감사기구 선정도 관리위원들이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전체 29명 중 과반수가 넘는 17명이 병원을 이용하는 무보수의 일반인 자원봉사자들이라는 점이다. 그중 가장 경력이 오래된 선임위원이 한인 교포 김장진씨다. 재영한인회와 한국노인회 런던 지부는 각종 자선공연을 통해 모은 기금을 킹스턴병원에 기부하고 있기도 하다.
   
   영국 공·사립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교 교장을 선임, 해임하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관리위원의회가 학교마다 있다. 예·결산과 학교 운영방안들이 다루어지는 관리위원회는 한국과는 달리 자문기구가 아니라 최종 의결기관이다. 필자가 관리위원 중 한 명으로 있는 한인촌 몰덴 마노 초등학교도 생업을 가진 지방 유지들과 학부모들이 무보수로 자원봉사를 한다. 여기 관리위원들도 야간에 회의를 하면서 학교를 책임지고 운영한다. 영국에는 지방교육청이라는 학교 관리감독기관이 아예 없다. 교육표준청(OFSTED·Office for Standards in Education)에서 감독관이 불시에 나와 학교의 교육수준을 판단할 뿐이다. 공립임에도 학교 예산은 학교 교장이 지방자치단체를 뛰어다니면서 손수 따와야 한다. 결국 이렇게 운영위원들과 교장, 교사들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학교가 운영된다.
   
   필자는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회 저명인사들을 찾으려면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테이트미술관 같은 문화단체나 공공기관, 자선단체의 재단이사(board of trustee) 명단을 찾아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실제 영국 거대 문화예술 단체 기관의 재단 이사회는 영국에서 영향력 100위 안에 드는 저명인사들로 가득 차 있다. 가끔 전직 총리가 들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낙선 하원의원이나 전직 장관 정도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명예로운 무보수의 재능 기부 봉사로 여기지 은퇴 후 생계유지 수단이나 용돈벌이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가 책임진 단체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불편부당한 결정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린다.
   
   
   아무 눈치도 안 보는 재능기부 이사들
   
   이런 사회 저명인사들의 재능기부식 자원봉사는 단지 문화예술 단체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국인들이 가장 애용하고 사랑하고 심지어 존경까지 하는 국민 기업인 존루이스백화점의 이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경력과 출중한 능력을 지닌 다른 상업회사 현직 경영인들까지 참여해서 아낌없는 도움을 주고 있다. 수년 전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인 영국항공(British Airway) 현직 회장이 무보수로 사외이사를 맡은 적도 있다. 그가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한 일이 아님은 영국 전체가 다 안다. 이 역시 ‘사회지도층의 재능기부 차원의 사회봉사’, 소위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하나다. 그래서인지 정계와 관계의 고위 공직자들이 퇴직하자마자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바로 산하 공공기관장과 상업회사의 고문직을 맡아 자신의 명예로웠던 지난날을 돈 몇 푼에 파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렇게 영국은 ‘노블레스(저명인사)’들의 ‘오블리주(책무)’만으로 돌아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 바로 영국 사회의 저력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생업만으로도 허덕이는 일반 직장인이나 서민들이 동네 병원과 학교의 무보수 관리위원직을 맡고 박봉의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이 각종 봉사를 하는 이유는 영국인의 핏속에 흐르는 ‘희생, 봉사, 자선’의 유전자 때문이라는 해석 말고는 더 이상의 분석이 불가능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노동자 계급인 서민층마저 넉넉지 않으면서도 자신보다도 더 못한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것이나마 나누면서 ‘주는 자의 기쁨’을 누린다. 지난한 현실에서도 ‘소확행’을 누리면서 비록 풍족하지 않은 삶에도 만족하고 살아간다. 차라리 자신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소시민들이 ‘투잡’을 뛸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해 가면서 봉사를 하고, 빠듯한 살림살이에서 한푼을 떼어내 자선을 하는 것을 보면 숭고해지기까지 한다. 사회 상중하 계급을 막론한 ‘희생, 봉사, 자선’이 영국 사회의 저력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 가진 자는 그만큼 많이 베풀고, 가난하다고 가진 자를 향해 무조건 내놓으라고 삿대질하지 않고 다들 나름대로 자신의 능력 내에서 한몫을 한다. 그래서 영국 사회는 갑을의 문제도, 금·흙 수저 언쟁도, 공정성의 시비도, 계급 간의 위화감도 상대적으로 적다. 이런 논쟁으로 나라가 갈라져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이런 영국인들을 보면 ‘희생, 봉사, 자선’에 대해서 미국 작가 잭 런던이 일찍이 남긴 명언을 되새겨볼 만하다. ‘개에게 던져 준 뼈다귀는 자선이 아니다. 당신이 개만큼이나 배가 고플 때 뼈다귀를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 자선이다.(A bone to the dog is not charity. Charity is the bone shared with the dog, when you are just as hungry as the dog.)’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두터운유럽(2021)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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