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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인 대한제국 멸망을 맞아 많은 선인들이 자결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자결했다고 알려졌다가 나중에 병사(病死) 순국한 걸로 수정된 이준 열사(1859~1907)는 익히 아는 인물이다. 그에 비해 이한응 열사(1874~1905)는 대한제국 멸망을 한탄해 자결한 최초의 열사임에도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다 할 기념도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열사를 잊고 있다가 1962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를 시작으로 1964년 10월 장충단공원에서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 주재로 순국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후 1995년 서거 90주년, 2005년 100주년 추모식이 열렸고, 2015년 11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개최됐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행사는 열리지 않고 있다.
   
열사가 숨진 영국에도 열사의 흔적은 단 한 곳에만 남아 있다. 현재 주영 한국대사관 입구 로비에 열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 흉상은 재영교민들의 열성으로 1993년 제작된 것으로, 대사관을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이한응 열사는 이준 열사 순국보다 2년도 더 전에 영국 런던에서 제1차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 늑체(勒締)로 시작된 대한제국 멸망을 예감하고 경각의 유서를 남긴 채 자결했다. 18살 때인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당시로는 상당한 선각자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해 관원으로 나섰고, 25살인 1899년 모교 영어 교관으로 선출된 수재였다. 1901년 27살에 영국(벨기에 겸임) 주재 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민영돈 공사와 같이 부임했다. 1904년에는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되었다.
   
   
   대한제국 독립 외치며 고군분투
   
이한응 서리공사는 1904년 1월 13일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세분석서 전달을 시작으로 영국 외교부를 부단히 접촉하면서 정식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 대한제국은 관심 밖의 국가였다. 일본과 1902년에 맺은 제1차 영·일동맹 확장 협약을 추진하고 있었고,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우월권을 영국으로부터 인증받으려 애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뺏으려고 공작 중이어서 영국에 이한응 열사를 만나지 말 것을 권고했기에 면담이 성사될 리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항상 걱정했었다. 그래서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고종 22년인 1885년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거의 2년에 걸쳐 거문도를 무단 점령까지 했다. 그런데 일본이 자신들을 대신해 러시아와 전쟁까지 벌여줬으니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러시아 해군, 특히 발틱함대의 정보를 일본에 제공해 러시아 패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러시아 남진 저지를 위한 ‘그레이트 워(Great War)’에서 일본과 이해가 맞아떨어진 영국으로서는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가 관심 밖이었다. 차라리 대한제국이 일본 영향권에 드는 걸 바랐을지 모른다. 30살의 초보 외교관인 이한응 열사로서는 이런 복잡한 정세를 알 리가 없었다.
   
당시 일본은 단번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순서를 밟아 일을 진행시켜 고종을 비롯한 중신들이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특히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제1차 한일의정서’는 침탈의 시작인데도 불구하고 내용이 아주 온건한 문구로 포장돼 있어서 대한제국의 장래에 어떤 심각한 의미를 갖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시 의정서 제1조는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를 확고히 믿고 시정(施政) 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인다’라고 돼 있다.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는 격이었다. 이어 제3조도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는 지키지 않을 사탕발림의 약속을 담았다.
   
위험성은 제4조에서 엿보인다. ‘제3국의 침해나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정황에 따라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는 위 대일본제국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한다.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 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 결국 대한제국 영토를 자기네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니 나라가 이미 망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영 공사관 폐쇄 공문 받고 자살
   
그러나 이한응 열사가 외교관으로서 가장 기가 막힐 일은 제5조였다. ‘대한제국 정부와 대일본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뒷날 본 협정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 보통 일제의 통치 기간을 경술국치 조약을 맺은 1910년 8월 22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라고 하지만 사실 대한제국은 이런 기막힌 내용을 담은 ‘제1차 한일의정서’를 맺은 날부터 망했다고 봐야 한다.
   
이한응 열사는 자신이 런던에 부임하고 나서 두 달도 채 안돼 이런 말도 안 되는 협약이 일본과 체결됐음을 알고 비분강개했다. 비록 초보 외교관이었지만 런던 주재 각국 공사관에 일일이 편지를 보내 일본의 야욕과 대한제국 독립을 역설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리고 영국 외무부에도 대한제국이 독립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담은 문서를 수도 없이 보냈다. 본국의 도움 없이 문자 그대로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더욱 의기양양해서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 전부터 자신들이 대한제국의 외교를 대리해 맡는다는 명분으로 1905년 4월과 5월 주청(駐淸) 공사관, 주영 공사관을 각각 폐쇄하는 계획을 세웠다.
   
총명했던 열사는 주영 공사관 폐쇄 소식을 듣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직감했다. 결국 이것이 열사를 자살로 이끌게 된다. 그러나 자살 하루 전까지만 해도 가족처럼 지내던 이웃인 본 윌리엄스 가족들과 피크닉 약속을 하는 등 죽을 마음이 없었다는 방증도 있다. 윌리엄스 가족 덕분에 우울증이 회복돼 영국 외무부에 회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기록도 있다. 이런 문서와 편지는 현재 런던 한인촌 뉴몰든에 있는 ‘서리역사센터’에 소장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열사는 본국으로부터 전문 한 통을 받은 후 다음날 자결한다. 현재 전문이 남아 있지 않아 내용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나 분명 공사관 폐쇄를 명령하는 전문이었으리라는 추측이다. 열사의 자결 이후 일본은 주영은 물론 주러, 주미 등 열강에 나가 있던 모든 공사관을 그해 7월 전까지 서둘러 폐쇄한다.
   
열사는 외교를 잘못한 책임을 절감하면서 3통의 유서를 남겼다. 자신의 자결 이유를 밝히는 유서와 부인·형님에게 남기는 유서였는데, 이를 마지막으로 열사는 1905년 5월 12일 교수(絞首) 자결했다. 한국 기록에는 ‘음독 자결’이라고 나오지만, 런던 경시청 사건 기록에는 분명 ‘교수 자결’로 되어 있다.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열사 자결 다음날 ‘공사관의 비극(A Legation Tragedy)’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순국 장소는 주영 대한제국 공사관 런던시내의 얼스코트(Earl’s Court) 트레버로드(Trebovir Road) 4번지의 3층 자신의 침실이고, 창문 끈을 문 뒤의 못에 걸어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고 썼다. 당시 주영 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은 외관이 전혀 변하지 않은 채 지금도 보존돼 있다.
   
   
   대한독립 운동의 시초로
   
열사의 시신은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검시 없이 이송되어 고종의 특명으로 용인에 안장됐다. 이후 장충단에 위패를 모시는 배향(配享)의 특전을 받았고, 종2품의 고위직인 궁내 내부협판(內部協辦·내무부 차관 격)으로 사후 승진됐다.
   
열사는 유서에서 국망(國亡)이 자결의 이유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오호라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종은 평등을 상실하여 각종 교섭에 치욕이 그지없으니 이 어찌 피끓는 자가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오호라 장차 종묘 사직은 망하고 민족은 노예가 될 것이다. 구차하게 살아남아 치욕을 더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잊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기에 찬 이 유서 전문은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어 향후 독립운동에 단초가 되었다. 열사의 자결은 국권 침탈을 맞고서도 결연히 행동하는 애국자 한 명 없는 현실에 대한 준엄한 경고이기도 했다. 열사의 자결은 큰 자극을 주어 민족운동의 시초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열사는 부인에게는 이런 유서를 남긴다. ‘오래 편지 못 하여, 향렴 간절하옵니다. 나는 별반 죄악은 없으나, 시운이 불행하여 이에 작별하니 진실로 원통하고 섭섭합니다. 그렇지만 사제 형편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으니, 나은 것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니 당신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나의 일 과히 생각하지 말으시고 생양가 모친 위로하시고, 어린 딸 잘 길러 자미드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덕이 없고 복이 없는 사람이오니, 생각하지 말고, 형님에게 의지하셔서 살으시옵소서. 찾을 돈은 한 육천여원이 되나 봅니다. 집안일은 다 형님께 말씀 올렸사옵기, 이만 씁니다. - 음 사월 구일 죄인 이한응 상장’
   
유서의 날짜는 음력 4월 9일로 표기돼 있는데 양력으로는 5월 12일이다. 자신은 양력을 쓰는 런던에 있으면서 부인에게는 음력으로 날짜를 적은 배려를 보면 열사의 자상한 인품을 알 수 있다.
   


   인터뷰 | ‘이한응 전문가’ 런던 주재 한국문화원 폴 웨이디
   
“이한응 열사 도와준 영국인 가족 있었다… 한국은 그들에게 빚이 있다”
   

런던 주재 한국문화원 홍보담당 직원인 폴 웨이디(Paul Wadey)씨는 이한응 열사 전문가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지만 그는 엄청난 관련 문서를 독파하면서 이한응 전문가가 됐다. 런던 서리역사센터에 보관된 대한제국 외교관들의 800쪽 편지와 버밍엄대학 도서관에 보관된 당시 영국 성공회 서울 교구의 문서 500여건, 그리고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당시 서울 주재 영국대사관의 보고서 수백 건을 어렵게 찾아내 모두 읽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동안 한국 학술잡지, 학술보고서 등에 기고도 많이 했고 발표도 했다.
   
   - 이한응 열사 연구에 열정적으로 빠진 계기가 뭔가. 
“몇 개의 우연이 만든 운명의 고리 때문이다. 대사관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할 때 옛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에 부착할 ‘푸른 현판(Blue Plaque·잉글리시 헤리티지 재단이 발급하는 역사적 건물 징표)’을 신청하려고 조사를 하다가 이한응 열사를 알게 됐다. 당연히 열사에 대한 자료 없이는 신청이 안 돼 조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자결하기 한 주 전 런던 하이드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열사를 누군가가 위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를 일본의 소행이라고 여긴 열사는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관련 경찰 보고서도 확인했다.”
   
   - 그 보고서에 흥미를 끌 요소가 있었나. 
“그렇다. 당시 공사관으로 찾아간 경찰에게 영국인 집사는 ‘이한응 공사가 런던 남부 도킹 근처 조그만 마을 리스힐로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고 알렸다. 그런데 도킹은 바로 내가 어릴 때 자라고 학교를 다닌 고향이다. 그래서 경찰 보고서 사본을 들고 리스힐 마을의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혹시 이런 자료와 연관된 가족을 아느냐’고 묻고 다녔다. 한 집에 갔더니 ‘건넛집이 이 마을에 오래 산 집이니 가보라’고 하더라. 바로 그 집이 당시 열사가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집이었다. 10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후손들이 그 집에 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역사의 손아귀에 잡혀 버렸다.”
   
폴 웨이디씨가 찾아간 집은 영국 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롤랜드 본 윌리엄스 경의 집이었다. 당시 윌리엄스 경의 런던 집은 대한제국 공사관 바로 옆에 있었다.
   
   - 열사가 윌리엄스 경의 집을 찾아간 이유가 뭔가. 
“경찰이 찾아간 그날도 열사는 윌리엄스 경 가족의 야외 피크닉에 가기 위해 런던에서 내려갔다. 윌리엄스 경 가족은 대한제국 외교관들을 가족처럼 챙겼다. 윌리엄스 경은 대한제국 외교관들이 귀국할 때면 이들이 타고 가는 배 선장들에게 편의를 봐주라는 소개서를 써주어 도움을 받게 하기도 했다. 당시는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라 외교관이라도 오랜 여행을 하는 동안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 윌리엄스 경의 소개서는 당시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외교관들의 감사 편지에 나온다.”
   
   - 대한제국 외교관들이 어떻게 윌리엄스 경과 친분을 맺었나.
“몇 개의 행운이 작용한 덕분이다. 당시 순종의 영어교사를 하던 릴리 졸리라는 외교관 부인이 영국으로 부임하는 외교관들을 본 윌리엄스 가족에게 소개했는데, 본 윌리엄스 가족이 친절하게 대해줬을 뿐 아니라 마침 옆집이 비어 있어서 대한제국 공사관이 임대하게 됐다. 이후 대한제국 외교관들은 본 윌리엄스 가족과 이웃이 되고 지극한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서리역사센터에 비치된 대한제국 외교관들의 편지에 이런 내용들이 나온다.”
   
웨이디씨에 따르면, 윌리엄스 경 가족은 대한제국 외교관들이 한·일병합 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도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면 흔쾌히 도움을 줬다고 한다. 당시 이한응 열사를 비롯한 대한제국 외교관들은 본국 정부로부터 지원도 못 받고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상태였다고 한다. 망국의 문턱에 선 대한제국은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기 힘든 지경이어서 이역만리 영국에 있는 말단 외교관을 돌볼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사를 비롯한 외교관들은 부단히 영국 외무부를 찾아가고 편지를 써서 어떻게든 일본의 손아귀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고 분투하고 있었다는 것이 웨이디씨의 말이다.
   
   - 대한제국 외교관들의 편지가 어떻게 보관돼 있나. 
“윌리엄스 경 가족에게 온 이한응, 민영돈, 이기현 등 외교관들의 편지는 나중에 윌리엄스 경 가족이 모두 서리역사센터에 기증했다. 이 편지들을 읽고 윌리엄스 경 가족과 대한제국 외교관들의 진한 유대관계를 알게 됐다.”
   
   

웨이드씨의 표현에 따르면, 만일 그날 열사가 도킹에 가지 않았거나, 경찰이 그날 열사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윌리엄스 경 가족과 대한제국 외교관들의 유대관계는 결코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혀 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웨이드씨의 고향이 도킹이 아니어서 관심을 안 가졌으면 역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다. 이렇게 역사는 ‘유탄의 우연’이 만든다.
   
서리역사센터에 보관된 편지들은 웨이드씨의 노력으로 모두 영문으로 번역돼 천안독립기념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대한제국과 영국의 초기 외교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가 웨이드씨의 신세를 진 셈이다.
   
웨이드씨는 일제강점기 때 서울로 파견되었던 영국 성공회 2대 교구장 아서 터너 주교의 서류들도 버밍엄대학교 박물관에서 찾아냈다. 성공회 한국 교구가 1960년대 본국으로 보낸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 자료들이다. 웨이드씨가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한국 YMCA 창설자이기도 한 터너 주교는 당시 일제로부터 핍박받는 조선인들을 수도 없이 보호해 주고 도와주었다. 이 성공회 자료 중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1905년 9월 대한제국을 방문했던 사진도 포함돼 있다.
   
   
- 당시 대한제국 외교관들이 힘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했다(naÏve)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결국 상황이 안 되어 결과를 못 냈을 뿐이다. 그걸 보고 순진했다고 말한다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한 그들에게 지극히 부당한 일이다.”
   
웨이드씨에게 ‘돈도 안 되고 본인과 관련도 없는 일에 열정을 쏟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한국과 영국의 친교가 공식 외교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개인들 간의 유대로도 시작되었음을 밝혀내고 싶었다”고 답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현재의 한국이 구한말 자신들의 외교관을 챙겨주고 보살펴준 본 윌리엄스 경 가족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한국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하면 윌리엄스 경 가족을 찾아보고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두터운유럽(2021)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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