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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영국의 가장(家長)이자 큰 어른인 필립 공이 100세 생일 두 달 전인 지난 4월 9일 런던 서부 외곽 윈저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국인들은 그로 인해 이제 한 세기가 끝나는 듯한 감회와 슬픔에 젖어 있다. 필립 공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왕실 배우자(Royal Consort)이니 관례에 따라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필립 공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제발 소동 떨지 말고 가족장으로 하라(no fuss and a private ceremony)”는 유언을 남겼다. 본인의 이런 희망과 코로나19 사태로 장례식은 4월 17일 유족 30명만 참석한 채 왕실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진다.
   
   통상 영국의 국장은 웨스트민스터홀에서 치러진다. 역사가 거의 1000년이나 된 이곳에 3일간 유해를 안치해 조문객을 맞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모든 국장은 그런 절차를 거쳤다. 사실 필립 공의 장례도 ‘포스 브리지 작전(Operation Forth Bridge)’으로 불리면서 무려 40년 전부터 준비돼 왔는데 이번에 오랜 준비가 무색하게 간소하게 치러지는 셈이다. 참고로 영국 왕실 주요 인물들의 장례 준비에는 모두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어 있다. 여왕은 ‘런던 브리지 작전(Operation London Bridge)’, 찰스 왕세자는 ‘메나이 브리지 작전(Operation Menai Bridge)’이라는 식이다. 여왕이 세상을 뜨면 ‘런던 다리가 무너졌다(London Bridge is down)’라는 긴급명령 발동으로 바로 장례 준비가 시작된다. 1988년에는 실제 ‘메나이 브리지 작전’ 명령이 발동된 적도 있었다. 스위스에 스키를 타러 간 찰스 왕세자 일행이 눈사태를 맞아 한동안 행방불명되자 혼비백산한 왕실이 작전 명령을 발동했었다.
   
   이번에 세상을 뜬 필립 공의 공식 호칭은 ‘필립 왕자 에든버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이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왕의 배우자이자, 가장 오래 산 남자 왕족이다. 한국 언론에서는 필립 공의 삶에 대해 여왕 곁을 ‘묵묵히 지켰다’는 식의 상투적 표현을 쓰지만 이는 잘못된 기술이라는 생각이다. 필립 공은 세계적 환경보전운동단체인 ‘세계자연기금 (WWF·World Wildlife Fund)’ 총재를 비롯해 800여개 자선단체 또는 기관의 총재나 후원자를 겸임하는 등 엄청난 활동을 해왔다. 2017년 은퇴할 때까지 70년 동안 무려 143개국에서 열린 행사에 2만2191회 참석해 5500번의 연설을 했다. 한국에도 1999년 4월 4일간의 일정으로 여왕과 함께 국빈방문했었다. 필립 공은 자신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경험 많은 현판 제막(除幕) 전문가”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는 14권의 저서도 남겼는데, 주로 자연환경 보전과 승마경기 등에 관한 책들이다. 직접 유화도 그려 상당한 수준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그림들은 윈저성과 샌드링엄 하우스 등에 걸려 있는데 머지않은 장래에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13살 여왕의 짝사랑
   
   필립 공의 일생은 초반 불운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그리스 왕의 조카로 태어났으나 군사혁명으로 생후 18개월 때 그리스를 탈출해야 했다. 헤어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얼굴도 보지 못했다. 4살 때는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으로 들어가자 영국으로 건너와서 혼자 컸다. 셋째 누나는 항공기 추락 사고로 죽었는데 자신의 결혼식에는 나머지 누나 3명도 초대받지 못했다. 누나들이 2차대전 중 영국의 적국이었던 독일 나치 장교를 비롯해 독일 왕족과 모두 결혼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런던에 있던 마운트배튼 백작 외삼촌이 유일하게 의지할 친척이었으나 1979년 IRA(아일랜드공화국군) 테러로 외삼촌을 잃는 슬픔도 겪었다.
   
   하지만 이런 불운도 여왕과 만나 결혼하고부터는 없어졌다. 보통 언론은 여왕과 필립 공이 ‘첫눈에 반한 사랑(love at first sight)’을 했다고 로맨틱하게 포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여왕이 아버지를 따라 다트머스 해군사관학교에 갔을 때 안내를 맡았던 필립 공과 긴 시간 얘기를 나누면서 인연이 시작되긴 했지만 사실 둘은 왕실 가족 행사에서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사춘기에 들어선 13살의 여왕이 아버지 조지 6세를 따라 다트머스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생도 제복을 입은 필립은 18살이었다. 여왕은 어머니를 닮아 영국인치고는 키(163㎝)가 작은 편이어서 키 큰 남자를 좋아했다고 전기작가들은 말한다. 그래서인지 금발의 푸른 눈에 조각 같은 용모와 훤칠한 키(183㎝)의 필립을 만났으니 반할 만도 했다.
   
   하지만 필립은 처음에는 여왕에게 관심이 없었다. 18살의 필립에게 13살의 여왕은 그저 아이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여왕은 필립에게 계속 편지를 쓰고 사관학교에 면회도 갔다. 필립이 임관해서 바다로 임무수행을 나간 뒤에도 여왕은 줄창 편지를 썼는데 필립은 마지 못해 가끔 회답을 하는 수준이었다. 필립이 여왕에게 비로소 관심을 가진 것은 여왕이 17살 되던 해 윈저성에 휴가차 머물 때였다. 이때 ‘알라딘’이라는 이름의 팬터마임에 출연한 여왕을 보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둘 사이에 드디어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여왕은 아버지에게 결혼하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아버지는 20살 넘어서 결혼하라고 권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는 둘이 사귀는 것을 왕실에서 반대했다는 기사도 많이 나오지만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조지 6세는 남자답고 건실하고 활달한 필립을 좋아했다. 그래서 필립이 휴가를 나오면 윈저성에 항상 묵게 했다. 심지어 8~9월 여름 휴가철에도 왕실 휴가지인 스코틀랜드 발모럴성에 초청했다. 바로 이 성에서 필립은 여왕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물론 왕실 중신들과 측근 귀족들은 무일푼의 필립을 경계했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여왕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텃세에 시달린 필립 공
   
   필립 공과 여왕은 빅토리아 여왕을 고조모로 둔 10촌 사이의 인척 관계다. 사실 외국 왕자인 필립 공은 군주가 될 여왕에게는 최적의 신랑감이었다. 국내 귀족 중에서 신랑감을 고르다 보면 다른 귀족들과의 역학관계 때문에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여왕이 될 왕위계승 공주(Crown Princess)의 남편 국서(國壻)는 외국에서 데려오는 것이 영국의 전통이었다. 메리 튜더 여왕(재위 1553~1558)은 스페인, 메리 2세 여왕(재위 1689~1694)은 네덜란드, 앤 여왕(재위 1702~1707)은 덴마크,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은 독일에서 각기 신랑감을 데려왔다.
   
   필립 공은 왕위계승 공주와 결혼하고 나서 가문 이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원래는 자신의 그리스 성을 영국식으로 바꾼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하려고 했지만 반대에 부딪히자 자신의 공작 이름을 따 에든버러 가문으로 하겠다고 양보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은 에든버러라는 성을 갖게 된다. 여왕도 처녀 때 성인 윈저가 아닌 에든버러가 될 판이었다. 그때 여왕의 할머니인 조지 5세 부인 메리 여왕과 당시 처칠 수상이 단호하게 여왕은 남편 성을 따르지 말고 윈저로 하라고 해서 필립 공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왕과 결혼 초창기 때 필립 공은 왕족, 귀족, 정치인 등과 같은 영국 상류층 인사들로부터 심한 텃세를 받았다. 심지어는 모욕(slights)을 당하기도 했다. 영국 상류층이 워낙 폐쇄적이고 엘리트 의식이 있는 데다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여왕을 어디서 나타난 빈털터리 외국 왕자가 낚아채 갔으니 약도 오를 만했다. 그들의 대표적 뒷담화거리는 결혼을 위해 개종을 했다고 하지만 필립 공은 가톨릭인 그리스정교회 신자였다. 물론 나라 없는 왕족에다가 무일푼이라는 점도 비아냥거리였다. 거기다가 가문 이름마저 윈저로 쓰면서 명분을 중시하는 상류층 내에서는 놀림감이 됐다.
   
   결국 여왕은 필립 공이 받는 모든 모욕과 수치를 없애주기 위해 몇 가지 확실한 조치를 취했다. 우선 직계 자식들이 개인적인 이름을 써야 할 때는 ‘마운트배튼-윈저’를 쓰게 했다. 특히 여자 자식들과 왕족 호칭이 안 붙는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이란 성을 쓰게 조치했다. 심지어 자신도 아주 사적인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윈저 부인이라는 성을 쓴 적도 있다.
   
   또 여왕은 필립 공의 공식 지위가 ‘현저하고 우선하게 여왕 폐하 다음(Place, Pre-eminence, and Precedence next to Her Majesty)’이라고 법으로 못을 박았다. 필립 공의 위치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지 못하게 공식화한 셈이다. 심지어 왕위계승권자인 왕세자 찰스보다 남편의 지위를 더 앞세웠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립 공은 모든 행사에서 항상 여왕 옆에 자리 잡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2인자가 되었다. 물론 필립 공 자신은 왕실 의전상 여왕과 함께 걸을 때는 항상 ‘두 발 뒤, 두 발 옆(two steps behind two steps aside)’을 유지했다.
   
  


  “우리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여왕은 필립 공이 무시당하지 않게 작은 곳에도 신경을 썼다. 필립 공과 같이 참석한 모임에서 연설을 할 때면 항상 서두를 ‘나의 남편과 나는(my husband and I)’이라고 시작했다. ‘우리(we)’라고 해도 되지만 반드시 필립 공을 ‘나의 남편’이라는 식으로 각인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입방아를 찧지 못하게 했다. 1997년 11월 20일 금혼식에서의 여왕 연설이 둘 사이를 잘 나타내는 좋은 예로 자주 회자된다. “그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그는 지금까지 언제나 나의 ‘힘이었고 지주(strength and stay)’였다. 그리고 나와 우리 전 가족과 이 나라(영국)와 (영연방의) 많은 나라는 그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혹은 우리가 영원히 알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빚을 졌다.”
   
   이런 진심 어린 말을 듣고 영국인은 이들 부부의 반세기에 걸친 금슬에 감동했다. 여왕은 2012년 자신의 대관 60주년 금강기념식(Diamond Jubilee) 때도 필립 공을 자신의 ‘변함없는 힘이자 안내인(constant strength and guide)’이라고 치하해서 필립 공이 울컥하는 장면이 TV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필립 공도 생전에 결혼생활이 원만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여왕의 아량(tolerance)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은 인내심 없고 성격이 급하고 과격한데 여왕은 말 한마디도 가려서 하고 참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이라 서로 보완 관계였기에 잘 살 수 있었다고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영국의 칼럼니스트들이나 작가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가 성공적이었다고 후세가 평한다면 그중 가장 큰 몫은 바로 필립 공에게 가야 한다’라고 그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한다.
   
   필립은 평소 자신을 “성미 고약한 늙은 놈(a cantankerous old sod)”이라고 자학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측근이나 친구들은 그에 대해 “겸손하고 소박하다(modesty and unpretentious)”는 평을 했다고 영국 언론은 전한다. 근엄한 표정을 한 채 평생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 여왕을 뒤따라가면서 연신 싱글벙글 웃는 필립 공에게서 영국인들은 자신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본다. 주머니에 사탕을 넣어 갖고 다니다가 만나는 아이에게 집어주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필립 공의 진가를 영국인들은 안다. 여왕 부부가 방문하는 장소 앞에 여왕에게 바치려고 꽃다발을 들고 늘어서 있는 아이들에게 연신 손짓하는 것도 필립 공이다. 아이들에게 경호선을 넘어 건너오라고 해서 경호원들을 기겁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는 수줍고 긴장된 표정으로 여왕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일생일대의 행복을 누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뒤에서 흐뭇하게 쳐다본다. 영국인들은 이런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다.
   
   
   썰렁한 농담과 실언의 의미
   
   필립 공을 말할 때 반드시 따라다니는 문제가 장소와 상황에 안 맞는 썰렁하고 실없는 농담과 갈피를 못 잡는 실언이다. 해외 순방을 가서 현지에서 한 실언은 항상 영국 언론에 1면 기사로 크게 났다. 예컨대 중국에서 만난 영국 유학생에게 “여기 너무 오래 있으면 찢어진 눈(slitty eyes)이 된다”는 말을 해 영국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필립 공의 실언은 정말 영국인들이 놀리는 것처럼 가히 예술(a piece of artwork)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테러로 인해 시력을 잃은 군인에게 여왕이 어느 정도까지 보이느냐고 묻자 옆에 있던 필립 공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아! 저 친구 넥타이 맨 것만 봐도”라고 해서 측근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 군인은 “내 생각에 필립 공은 그냥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농담한 것으로 안다.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고 화답했다.
   
   필립 공의 실언 같은 농담 리스트는 가히 전설이다. 생각나는 대로 소개하면 이런 것들이다. 톰 존스가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필립 공은 “자네는 뭘로 입을 헹구는가? 자갈?”이라고 물었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놀리는 농담이었다. 엘튼 존이 노래 부르는 중간에 옆 사람에게 “난 저 친구가 마이크를 끄고 노래 불렀으면 좋겠다”라고 한 적도 있었다. 노래가 시끄럽고 듣기 싫다는 직설적 표현이다. 파푸아뉴기니에 가서는 영국 학생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여기서 안 잡아 먹히고 살아남았네?”라고 물었다. 관광 진흥에 힘쓰는 런던 시청 개관식에 가서는 “런던의 문제는 관광객이다. 관광객이 차량정체를 일으킨다. 관광객을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차량정체가 해결된다”라고 말해 시청 관계자들을 경악게 했다. 또 전통옷을 입은 나이지리아 대통령을 보고는 “당신은 이제 바로 잠자리에 들 준비가 되었네요”라고 했는데 천을 둘둘 만 듯한 나이지리아 전통옷을 보고 한 말이었다. “당신이 바로 그 거지 같은 채널4 프로그램을 만드는 책임자구만!”은 영국 상업 TV 채널4 회장을 만나서 한 말이었다.
   
   고등교육을 받고 격식을 차리며 살아온 필립 공이 치매가 아닌 다음에야 물의를 일으킬 실언을 일부러 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사실 필립 공의 실언은 말이 실언이지 심려 깊은 자기희생이라는 평가가 많다. 심각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죽기보다 싫어하고 웃으면서도 할 일은 다 하는 허허실실 영국인들은 필립 공이 왜 그런 언행을 하는지를 잘 안다. 좌장이 먼저 망가져서 딱딱한 공식 모임을 훈훈하게 만들려는 필립 공의 속 깊은 마음자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 망가지는 방법이 실언을 가장한 농담이거나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자학(自虐)과 가학(苛虐)의 농담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필립 공이 영면하자 영국인들은 “그런 사람을 우리는 이제 다시 볼 수 없다. 누구도 필립 공을 대체할 수는 없다”면서 깊은 애도를 했다. 세상은 그의 어떤 농담과 실언도 다 받아주었다. 농담과 실언을 했다고 항의를 받아본 일도 없었고 사과까지 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2017년 필립 공이 외부 공식 업무를 내려놓고 은퇴한다고 했을 때 아주 섭섭해했다. 나라의 할아버지 같은 필립 공을 보지 못하는 섭섭함과 동시에 그의 난센스 실언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유였다. “아니 더 이상 왕립 실언(Royal gaffe)을 못 듣는다니? 이제 ‘국보(national treasure)’를 잃어버리는 거야”라는 말까지 있었다.
   
   
   95세 생일 홀로 맞는 여왕
   
   남편을 잃은 아내의 고통을 세상에서는 ‘붕성지통(崩城之痛)’이라고 표현한다. 외풍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무너진 아픔이라는 뜻이다. 필립 공이 떠난 후 영국인들은 여왕을 걱정한다. 강철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도 자신을 잡아주던 바위(rock)라고 부르던 남편 데니스가 죽고 나서 2년 뒤 치매에 걸려 8년 동안 고생하다 숨진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왕은 남편 장례식 4일 뒤인 4월 21일, 결혼 74년 만에, 날짜로 치면 2만5265일 만에 처음으로 남편 없는 95세 생일을 맞는다. 그날을 혼자서 어찌 맞을지 여왕을 사랑하는 영국인들은 아파한다. 이렇게 슬퍼하는 영국인들에게 윌리엄 왕세손이 한 말이 있다. “할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하늘에서도 ‘이제 (그만 징징거리고) 하던 일 계속해(Oh do get on with it!)’라고 할 것이다.”

 

 주간조선 

 

 

권석하
 

재영 칼럼니스트.
보라여행사 대표. IM컨설팅 대표.
영국 공인 문화예술해설사.
저서: 유럽문화탐사(2015)
번역: 영국인 발견(2010), 영국인 재발견1,2 (2013/2015)
연재: 주간조선 권석하의 영국통신, 조선일보 권석하의 런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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