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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영국 연재 모음

 

 

제 1차 세계대전

20세기 초는 영국에게 낙관적 시대였다. 확장된 제국, 잘 훈련되고 존경받는 해군, 활짝 핀 산업, 강한 정치 조직을 갖춘 영국은 오늘날 용어를 빌면 ‘초강대국’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회적 진보가 있었던 시기였다. 실업자에 대한 경제적 도움과 연금, 무료 학교급식 등은 몇 개의 중요 예에 불과하다. 근로 현장에서 안전을 향상하기 위해 다양한 법들이 통과되었다. 더는 슬럼가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계획법이 강화됐으며 이혼 혹은 별거에 따른 싱글맘과 그들 자녀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었다. 지방 정부가 더 민주화되었으며 국회의원들 세비가 처음으로 주어짐으로써 더 많은 사람이 공공의 삶에 관여하는 길을 쉽게 했다. 이 시대 낙관주의와 진보는 몇몇 유럽 국가들과 전쟁이 발발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랜즈 페르디난드 황태자(Archduke)가 암살을 당했다. 이것은 세계 1차 대전(1914-1918)과 연결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암살 사건이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고는 하나 다른 요인들, 여러 유럽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주의, 군국주의 확장, 제국주의, 그리고 주요 유럽 강대국들이 두 패로 나눠진 것 등 전쟁을 위한 여러 요인이 성숙했다.

 

갈등은 유럽 중심부에 있었지만, 그것은 세계 국가들이 관련된 전 지구적 전쟁이었다. 영국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며 그 연합국에는 프랑스, 러시아, 일본, 벨기에, 세르비아, 나중에 그리스, 이탈리아, 루마니아, 미국이 참여했다. 대영제국의 전 지역이 분쟁지역이었다. 예로, 백만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여러 나라에서 영국을 대신해 싸웠고 이들 가운데 4만 명 정도가 전사했다. 서인도,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카나다에서 온 병사들이 영국과 함께 싸웠다

 

이 연합국들은 중앙 세력들, 독일이 중심이 된 오스트로 헝가리 제국, 오토제국 후에 불가리아가 참전한 연맹국들과 거하게 붙은 것이었다. 수백만 명이 죽었고 부상을 당했고 영국의 경우 사상자가 2백만 명이 넘었다. 1916년 7월 프랑스 솜므강 전투에서 전투 첫날에만 6만 명의 영국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계 1차 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11시 영국과 그 연합국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아일랜드의 분할

1913년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 대한 자치(Home Rule)를 약속했다. 그것은 아일랜드 자치 정부를 가지고 스스로의 국회를 가진 상태였으나 여전히 영국의 일부였다. 자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러자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이 무력으로 자치에 대항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세계 1차 대전의 발발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서의 어떤 변화도 연기해야만 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기다리지 않았고 1916년 수도인 더블린에서 영국에 대항하는 부활절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의 지도자들은 군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영국 군대와 경찰에 대항하는 게릴라 전이 아일랜드에서 연이어 발생했다. 1921년 평화조약이 체결됐고 1922년 아일랜드는 두 개의 국가로 나뉘었다. 주로 신교도들이 사는 아일랜드 북쪽 주들은 영국의 일부로 북아일랜드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나머지 아일랜드 지역은 아일랜드 자유 국가가 되었다. 자치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1949년 공화국이 되었다.

아일랜드가 북쪽과 남쪽으로 분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아일랜드가 하나의 독립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수십 년의 불일치가 북아일랜드와 다른 지역에서 테러작전을 일으키게까지 되었다. 아일랜드 전체의 독립을 원하는 측들과 영국 정부에 남아있고자 하는 측들과의 분쟁은 종종 ‘the Troubles’(아일랜드 통일전쟁이라는 단어 대신 영국은 신조어를 만들어서 그 의미를 반감시키고자 하고 있다.)

 

 

나라 안의 전쟁기간

1920년대에 사람의 삶의 조건들이 많이 나아졌다. 일반 대중 주택들이 개선되었고 새집들이 많은 읍내와 시가지에 지어졌다. 그러나 1929년 세계는 대공항에 빠져들었고 영국의 일부 지역 또한 대규모 실업자가 발생했다. 1930년대의 대공항의 여파가 영국의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영향을 주었다. 전통적으로 중장비 산업들, 선박 건조 같은 사업들은 타격이 심했고 새로운 산업들, 자동차나 항공 같은 산업들은 발달했다. 상품 가격이 내려감에 따라 노동자들은 쓸 돈이 많아졌다. 자동차 소유자들이 1930년과 1939년 사이 백만에서 2백만 명으로 두 배 증가했다. 또한 새로운 많은 주택이 건설되었다. 그래함 그린, 에블린 오우 같은 유명한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던 문화적 개화기이기도 했다. 경제학자인 존 매이나드 케인즈는 새로운 경제 이론서를 출판하여 큰 영향을 미쳤다. 1922년 BBC는 첫 방송을 시작했고 1936년에는 세계에서 최초로 정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 후 연합국에 의해 독일에 부과된 전쟁 배상금이 공정치 않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또한 독일 국민을 위해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조약과 관련한 재협상을 시작하면서 군수 공장들을 증설했으며 이웃 국가들에서 독일 군대의 무력을 시험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정부는 또 다른 전쟁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공격을 막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전쟁은 최초로 추축국(파시스트인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 제국=이들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중심 축이 되겠다고 전쟁을 일으켜 추축국으로 불린다.)들과 연합국과의 싸움이었다. 주요 연합국으로 영국, 프랑스, 폴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연합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한 후, 히틀러는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통치함으로써 폴란드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다. 1940년에는 독일 군대가 연합국을 패퇴시키고 프랑스로 진군했다. 국가적 위기의 이 시기에 위스톤 처칠이 수상이 되어 영국의 전쟁을 이끌었다.

 

 

윈스턴 처칠(1874-1965)

정치인의 아들이었던 처칠은 1900년 보수당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군인이었고 저널리스트였다. 1940년 5월 그는 수상이 되었다. 그는 나치에 항복을 거절했으며 고난의 시기에 영국 국민에게 자극을 불어넣었다. 그는 1945년 총선에서 낙선했으나 1951년 수상으로 복귀했다.
그는 1964년 총선에서 내려올 때까지 국회의원으로 있었다. 1965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오늘날에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있고 2002년 국민이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유명한 연설을 많이 했다. 그의 연설문들은 오늘날에도 들을 수 있다.

나는 피와 땀과 수고와 눈물 이외에는 제공할 게 없다 - 1949년 수상이 되고 나서 하원에서의 처음 연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착륙장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평야에서, 길거리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 1940년 던커크에서 철수 후 국회 연설.

인간의 전쟁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적은 사람에게 빚을 진 적이 없었다.’ (전 세계를 위해 영국이 싸우고 있다.) - 1940년 영국 전쟁 동안 국회 연설.

윈스턴 처칠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의 지도자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가 함락되자 영국은 대규모 해상 작전을 통해 영국군과 프랑스 군대를 프랑스로부터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영국에서 온 작은 유람선과 고기잡이배를 가진 많은 민간 자원봉사자들이 3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을 던커크 지역에서 구조, 해군을 도왔다. 비록 많은 병사와 많은 장비를 잃었지만 이 철수 작전은 성공했고 이것은 영국이 독일에 대항해 싸움을 더 잘 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던커크 정신’이라는 말이 나왔다.

1940년 6월 말부터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때까지 영국과 그 제국들이 나치 독일에 거의 홀로 대항하고 있었다.

 

 

 

박필립 칼럼리스트(www.facebook.com/thamespark)

굿모닝런던 발행인

영국 안중근청년아카데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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