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디럼(Wadi Rum) 광야를 여행하는데 낙타가 묶여 있었습니다. 처음엔 긴 줄이었지만 요동하는 터에 줄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며칠간 여행하는 내내 낙타는 그렇게 자신을 억압한 줄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다른 낙타는 놓아서 키우는데 왜 저 낙타만 묶었는지를 물었더니 간단한 답을 했습니다. 풀어주면 한없이 도망간다 했습니다. 줄에 묶여 있을 때 자유 하는 법을 배워야 묶인 줄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낙타에게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인간의 삶도 그와 같습니다. 삶은 홀로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인정받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공부합니다. 직장인도 그러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고, 아내 또한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지 못하고 인내하며 살아갑니다. 사회적 환경이 그러합니다. 자기 속에 담긴 것을 다 표출한다면 아마도 세상은 붕괴할 것입니다. 인정받는 것은 인정하는 사람에게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자기 성장입니다.
삶은 무한대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속한 단체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이는 속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유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내를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 속박을 벗어던지고 방랑의 삶을 사는 이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영국에서 노숙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노숙 생활이 자유로워서 좋다 했습니다. 정부에서 작은 아파트도 무상으로 임대 해 주어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속박이라 하여 뛰쳐나왔다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못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종교적 노예로 삼는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속박의 다른 표현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고백적으로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많은 선지자가 기록한 것은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격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라는 말은 구약성경에만 246번이나 사용될 만큼 누구나 사용할 보편적 용어입니다.
특히 시편 136편은 26절이라는 짧은 시이지만 무려 26회나 사용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랑 장이 고린도전서 13장이라면 구약의 사랑 장은 시편 136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을 마치 국지성 집중 호우처럼 쏟아부었습니다. 다른 곳은 비가 적당히 내릴지라도 어느 지역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내리는 비와 같이 시편 136편에는 댐에 물이 넘칠 만큼 부어졌습니다. 이 시편은 여호와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장막절의 공식 예배의식에서 불렀던 찬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을 광야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그들이 받은 훈련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인 사랑을 터득하기 위함입니다. 그 관계를 위해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했습니다. 그들이 살았던 환경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과 광야였습니다. 그곳에서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은 살았습니다. 한낮에는 온도가 사람이 혼절할 만큼 덥지만 구름으로 가려서 서늘하게 생활 수 있게 했습니다. 밤에는 온도가 내려가 추위에 죽을 만큼 온도지만 불기둥으로 따뜻한 밤을 보내게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라는 특별한 음식으로 살았고 그들의 옷이나 신발이 해어지거나(신29:5) 병들지 않게 했습니다.
광야학교에서 그들이 배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종교적 억압을 받고 있다 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오히려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국가의 사랑을 억압이라 생각한 영국의 한 노숙인과 같았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이유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를 압축하여 잘 번역한 말은 ‘러빙카인드니스’(LoveingKindness)입니다. 사랑의 현재 진행형과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단어가 합성된 말로써 우리말은 인자, 인애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선지자나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을 따르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철없는 사춘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억압이라 생각하여 집을 뛰쳐나간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을지라도 철이 들었을 때는 그 사랑이 시리도록 그리워질 때가 있게 됩니다. 인간이 호흡하는 것 역시 사랑의 힘입니다. 밥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직장을 다닐 힘과 지혜가 있는 것도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삶은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살기에 거만해지거나 타인을 무시하고 홀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그 나약함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강점이 되기도 합니다.
삶은 그 사랑 안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사랑을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이들에게 그 사랑을 나눠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