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주간조선 2783호(2023년 11월 14일 자)에 ‘중동에 뿌려진 비극의 씨앗… 밸푸어 선언’을 쓴 바 있다. 이 글이 나간 뒤 주간조선 독자 몇 분이 개인 이메일로 ‘왜 영국과 미국인들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옹호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왔다. 그에 대한 답과 함께 반(反)유대주의를 대하는 영국의 ‘사회적 합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 사회에서 팔레스타인 특히 하마스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반유대주의 언행은 거의 자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영국 노동당 직전 당수였던 제러미 코빈 하원의원에게서 찾을 수 있다. 2020년 4월 4년 반에 걸친 당수직에서 내려온 제러미 코빈은 6개월 뒤인 2020년 10월 후임 당수 키어 스타머에 의해 출당되고 만다. 출당 19일 만에 노동당 최고 의결기관인 전국집행위원회(NEC·National Executive Committee)의 결정으로 복당이 이뤄지긴 했지만 출당과 동시에 정지되었던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의 지위는 복권되지 않았다. 스타머 후임 당수가 코빈의 ‘노동당 소속 의원으로서의 자격 정지’를 취소하지 않아 결국 무소속 하원의원이 되고 말았다.
코빈이 이런 극형을 당한 이유가 바로 반유대주의 발언 탓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의견 한마디를 밝힌 것이었지만 엄청난 희생이 따른 셈이다. 2020년 10월 29일 발표된 영국 정부 산하 독립 기관인 ‘평등과 인권위원회(EHRC·Equalities and Human Rights Commission)’의 한 조사보고서가 발단이었다. 자신이 당수로 재임하던 때의 노동당 내 반유대주의 경향을 조사한 이 보고서에 대해 코빈은 “조사보고서가 밝힌, 노동당 내에 팽배하다는 반유대주의는 보수당과 언론이 과잉되게 극적으로 과장한(dramatically overstated) 탓이다”라고 비난조 의견을 밝혔다. 보고서는 노동당 내에 반유대주의가 만연하고 있음에도 코빈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적시하고 있었다.
노동당 내 반유대주의 조사 보고서
그런데 이를 빌미로 스타머 당수가 정치인으로서는 극형에 해당하는 당권 정지와 노동당 하원의원 자격 정지 조치를 동시에 취해버린 것이다. 영국 정치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후임 당수에 의한 전임 당수 매장 사건이었다. 당시 스타머의 극형 선언은 마치 전광석화 같았는데, 시간대로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10:00 인권위원회 조사보고서 발표
10:36 코빈의 의견 발표
11:07 스타머 당수 ‘보고서의 반유대주의 언행이 과장되었다거나 정파적 공격이라고 본다면 그것이 바로 문제점’이라고 발언
12:15 코빈은 13시에 방영될 인터뷰에서 ‘보고서 여러 곳의 지적에 대해 동의할 수 없고 당수 재임 시 노동당 내의 반유대주의는 분명히 과장된 것이 맞다’고 주장
13:06 13시에 코빈의 인터뷰가 방영된 지 수 분 만에 노동당이 코빈의 당권 정지시킴’
물론 코빈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 극렬 반발해 왔다. 자신에게 씌워진 ‘반유대주의자’라는 오명은 누명이라는 입장이다. 단지 일방적으로 불행을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인도적으로 보살피자는 뜻이었을 뿐이라고 자신의 과거 언행을 변명했다.
스타머 당수가 이런 조치를 전광석화같이 내린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돼 왔다. 무엇보다 당시 보수당에 비해 거의 2배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던 노동당의 인기가 코빈의 반유대주의 언행으로 인해 꺼질지 모른다는 초조감이 있었다. 실제 코빈이 당수로 있던 2018년 이미 51%의 영국 유권자들이 노동당이 반유대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본다는 조사도 있었다. 또 85%의 영국 내 유대계 영국인들이 코빈을 반유대주의자로 본다는 보도도 있었다.
지난 3월 28일 영국 노동당 최고의결기관인 전국집행위윈회는 그간의 조치도 모자란다는 듯 코빈의 관에 못을 박는 마지막 조치까지 취했다. 내년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서 코빈의 노동당 후보자격 박탈이다. 위원회 위원 34명 중 22명이 찬성하고 12명이 반대해서 이 조치가 가결돼버렸다. 해당 위원회는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코빈의 당권 정지 조치를 19일 만에 번복한 적이 있을 정도로 친(親)코빈적이었으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최종이어서 재심은 어떤 경우에도 없으니 코빈은 이제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게 됐다. 16살에 당원이 된 후 54년간 줄곧 노동당원이었고, 35살인 1983년 초선 이후 40년간 10선을 쌓으면서 당수까지 오른 코빈으로서는 심각한 배신을 당한 셈이다. 영국 정치에서 무소속 출마는 결국 낙선을 의미한다.
코빈 지지 극좌단체 ‘모멘툼’의 반발
스타머 당수가 이렇게 전격적으로 코빈을 처벌한 데는 코빈의 반유대주의 정서가 다음 총선에 피해를 준다는 걱정 때문만이 아니다. 바로 코빈의 열성 지지단체가 일으키는 노동당 내 당파 싸움 때문이다. 영국 정치에는 코빈에 대해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는 당내 단체인 ‘모멘툼 운동(Momentum Movement)’이 있다. 영국 정치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이 개인 지지 단체는 노동당 지도부에게는 심각한 골칫거리이다. 이 단체 회원들은 현재 전국 지구당마다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노동당 내 극좌 당원 3만명이 운집한 모멘툼은 현재 코빈의 당권 정지와 후보자격 박탈을 두고 현 당수 스타머를 ‘노동당의 푸틴’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면서 극렬한 비난을 퍼붓고 있다.
모멘툼이 추구하는 정책이 전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 이전의 정책들이라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 영국 유권자들은 전통의 노동당 정책을 파기한 블레어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새로운 노동당’에 연달아 세 번이나 정권을 주었다. 또 코빈이 이끈 노동당에는 지난 총선을 통해 두 번이나 반대를 표시했었다. 그럼에도 모멘툼은 아직도 비현실적인 이상만을 내세우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을 당내에서 실현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구에서 비코빈파 현직 의원을 후보에서 축출하고 자신들의 후보를 내세우려는 반란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극렬 후보를 내세우면 전통의 노동당 지역구도 위험해진다는 여론조사가 있는데도 모멘툼 지지자들은 친코빈파 후보를 내세우려고 노동당이 지금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당내 반란을 꾀하고 있다. 이런 당내 반란은 집권을 앞두고 있는 노동당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멘툼 지지자 비중이 당내 특히 일반당원 분포를 보면 무시할 수도 없다는 데에 현 노동당 지도부의 고민이 있다. 코빈의 등장으로 노동당은 전대미문의 당원 증가를 누려서 한때 축제 무드에 빠져 행복해 한 적이 있었다. 그런 행복이 이제는 암적 존재로 등장한 셈이다. 코빈이 당수 후보로 출마하면서 노동당에는 젊은 당원들이 몰려들었는데 2015년 5월 기준 20만1293명이던 당원 숫자가 2016년 1월 8개월 만에 무려 38만8407명으로 급증했다. 거의 100%가 단기간에 늘어난 것이다. 노동당 당원 숫자는 1990년대 최고치인 600만명 선에서 계속 줄어들고 있었는데 거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셈이다. 바로 코빈 개인에 대한 열광적인 팬들이 당원 가입을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무조건 지지에 메스꺼움 느낀다”
이들 코빈 지지자들은 기존 노동당 정책과는 동떨어진 반항아 코빈의 정책을 무조건 따르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반유대주의·친팔레스타인 정책이다. 코빈파들은 이스라엘을 보다 과감하게 통제해서 팔레스타인을 보호해주고, 궁극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을 독립시키라는 요구를 한다. 동시에 토니 블레어가 폐지한 거대 서비스 기업의 재국유화를 비롯한 사회복지 확대 등 과거 노동당 가치를 정책에 다시 도입하자는 주장도 펴고 있다. 실제 코빈은 노동당 역사상 가장 지독한 반항아였다. 노동당이 집권당으로 있던 1997년부터 2010년 사이 14년 동안 당 정책에 어긋나는 투표를 한 적이 무려 428번이나 되었다. 이런 코빈의 정책을 모멘툼 소속 당원들이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코빈은 지난 10월 런던 시내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에서 “나는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겠다는 영국 정치계에 대해 극심한 메스꺼움을 느낀다”며 맹비난을 가했다. “지난 2주 동안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겠다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일이다. 나는 그걸 비난한다. 오늘도 이스라엘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고, 그 결과 팔레스타인인들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유엔이 휴전 지지 결의를 하려고 할 때 영국이 기권한 일은 정말 수치스럽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과 정반대로 지난 12월 7일 영국 총리 리시 수낵은 “우리는 이스라엘과 절대적(unequivocally)으로 같이할 것이다”라고 이스라엘을 비호했다. 수낵 총리는 “영국이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이유는 유엔헌장에 의한 이스라엘의 자위권 보장 때문”이라는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노동당 당수 스타머도 수낵 정부의 휴전 지지 기권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노동당 내에서는 당수 스타머의 이런 친이스라엘 입장에 반대하는 극심한 반란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다수당인 국민당이 제안한 ‘가자지구 전투에 대한 휴전권고안’에 스타머가 반대했다는 이유로 전대미문의 반란이 일어나는 중이다. 소속 의원 175명 중 약 3분의1에 해당하는 56명의 노동당 하원의원이 노동당의 친이스라엘 정책에 반발해 국민당의 휴전권고안에 찬성 투표를 했다. 거기다가 노동당 그림자내각의 차관급인 10명의 하원의원도 내각직을 사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머는 “이건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일에 해당하기에 무슨 명분으로도 양보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며 보수당과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인구 0.5%가 여론에는 절대적 영향력
그렇다면 왜 영국 정부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전적으로 지지하느냐는 의문에 대답할 시점이다. 영국 내 정재계, 언론과 미디어를 비롯한 영국 사회 전반의 여론 형성 그룹 내의 유대인 영향력만으로는 영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지가 해석되지 않는다. 영국 내 유대인 인구는 생각보다는 상당히 적은 편이다. 2021년 인구조사에서 자신을 유대계라고 한 인구는 겨우 27만명(전체 인구의 0.5%)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대계가 영국 내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이 비중보다는 훨씬 더 크다고 보아야 한다. 현역 하원의원만 해도 8명이나 될 뿐 아니라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여론 형성 그룹에서 유대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인구 비율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다. 그런 여론 형성 집단의 영향력으로 일반 영국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정서로 기울어 있다. 특히 이번 가자지구 전투 이후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영국인들이 알게 모르게 느끼는 유대인 박해에 대한 원죄의식이 친이스라엘 정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영국 역사 속에도 유대인 추방은 있었다. 1066년 영국을 정복한 정복왕 윌리엄 노르망디 공이 초대해 영국에 발을 내디딘 유대인은 1290년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추방당해 1650년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다시 초대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두 번의 초대는 모두 정치적 기반이 약한 독재자가 유대인의 금력을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영국 내에서도 유대인 차별은 있어 왔고 사실 지금도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2차대전 중 유대인 600만명이 나치에 의해 살해된 데 대한 일말의 책임감과 함께 유대인 박해 역사까지 곁들여져 원죄를 느끼는 영국인들도 많다.
유럽에서 반대유주의 정서는 뿌리 깊다. 성경에 고리대금업은 기독교인들이 할 수 없다고 돼 있어 불가촉 천민에 가깝던 유대인들만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처럼 고리대금업을 해왔다. 덕분에 아직도 세계 최고의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인 금융가문이 현존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대인들의 부는 유럽 어디서나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반유대 정서는 유럽인들 핏속에 들어 있다. 자신들의 종교인 기독교의 신(神)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 멸시는 당연시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역사로 인한 반유대주의 정서보다는 차라리 그런 원죄를 씻어내는 듯한 친유대 정서가 영국 사회에 언제부턴가 팽배하고 있다. 거기에 반하는 반유대주의는 코빈의 경우에서 보듯이 순식간에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반유대주의 정서가 없어진 것은 분명 아니다. 한 기관(‘the Community Security Trust’)의 조사에 의하면 2018년이 영국에서 반유대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난 해였다. 2017년보다 16%가 더 일어났다. 이런 조사 등으로 영국 사회에 반유대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일렁이던 2020년 마침 노동당 내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막 노동당 당수로 취임한 스타머로서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직전 당수에게 돌리고 자신은 빠져나와야 할 판이었다. 안성맞춤으로 코빈이 반유대주의 발언까지 해서 스타머는 전광석화처럼 극단적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코빈이 노동당 후보로 출마하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는 데 큰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가 컸다. 결국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속담이 여기서도 통한 셈이다.
스타머 당수는 코빈으로 인해 퇴색된 노동당의 제3의 길 정책을 다시 한번 선명하게 내세울 태세다. 노동당이 바뀌었고 특히 반유대주의는 노동당 내에서 발을 들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유권자들에게 확실하게 전달하며 중도파 유권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펼치는 중이다.
실제 스타머는 취임 연설에서도 당수로서 반유대주의라는 독소를 뿌리부터 뽑아내는 정책을 앞세우겠다면서 이와 관련된 제도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유대인 단체들은 환영 성명을 내는 등 지지 일색이다. “코빈이 4년간에 한 일보다 스타머가 4일 동안 한 일이 더 많다”라면서 스타머의 정책을 반겼다. 그러나 스타머의 친유대주의 정책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다. 누설된 당 내부 문서에 의하면 당내 일부 당파들이 “전 당수 코빈에 대해 당파적 비난의 강도가 비정상적일 만큼 너무 높다”며 반발하고 있다.
코빈의 적은 보수당이나 노동당 내부에만 있지 않았다. 기득권층 여기저기에도 많았다. 2016년 7월 런던정경대학교가 영국 주류 언론 8개에 나온 812개의 기사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75%가 코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거나, 하지 않은 부정적·비우호적 기사였다고 지적했다. 당수로서 두 번째 치른 2019년 총선에서 참패한 이유도 영국 주류 언론의 그런 평가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전통의 좌파 언론으로 평가받는 가디언마저도 코빈의 반유대 성향을 들어 노동당 지도자로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할 정도였다.
역외자, 심하게 말해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받던 코빈은 결국 제도권 내 기득권 세력 누구에게도 내부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고는 팽당한 셈이다. 그 이유가 바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도 직접 연관돼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주간조선